뉴질랜드 이민열전 3-3 권영진 대표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이민열전 3-3 권영진 대표

일요시사 0 2636

    제임스는 모스번의 유지이다. 마을 행사 때마다 그는 빠지지 않는다. 반상회 같은 소소한 모임부터 총리가 참석하는 근사한 자리까지 지역 사회 일원으로 제 역할을 다해 내고 있다. 그는 절대 몸만 가지 않는다. 가게 물품을 기증하거나 어니스트 러드포드 초상화가 새겨진 지폐($100)를 아낌없이 내놓는다. 지역에서 번 돈을 지역을 위해 쓰겠다는 의지가 있어, 지금까지 큰 탈 없이 모스번에서 터를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난 호에 이어>


한국, 호칭 사회 아닌 이름 사회로 가야

 ‘나는 누구인가?’

 누구는 나를 박 사장이라 부르고, 또 누구는 박 선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장이라 하는 이유는 조그만 비즈니스를 한 경력이 있어 그렇고, 선생이라 하는 이유는 애들을 좀 가르친 경험(과외)이 있어서 그렇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아이들 이름을 빌려 ‘OO 아빠라고 부르고, 교회에서는 박 집사라고 부른다. 나는 하나인데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호칭한다.

 내 영어 이름은 Paul()이다. 스무 해 전 이민 와서 우연히 정한 이름이다. 한국 이름을 고집하고 싶었지만, 비즈니스 때문에 키위들이 편하게 부르도록 폴이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솔직히 말해 이런저런 호칭이 내게는 좀 버겁다. 호칭에 갇혀 거기에 맞게 처신해야 하는 탓이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사장이나, 선생은 직함이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호칭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름)이 아닌, 직책(호칭)으로 대접받는 사회는 결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 틀을 깨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 대열에 설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호칭 사회가 아닌 이름 사회로 가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응원을 부탁한다.

 

모스번 휴게소, 밀포드 사운드 가는 길에 위치

 제임스 권(권영진, 글의 문맥 때문에 앞으로는 제임스로 씀) 2003년 모스번 휴게소(Mossburn Diner)를 인수했다. 데어리 겸 테이크 어웨이(Takw Away)를 주로 하는 작은 식당이다. 뉴질랜드 남섬 최대의 관광지라 할 수 있는 밀포드 사운드(Milford Sound)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IMF 사태 때 내 귀찮은 뒤처리를 해준 키위 친구가 있었어요. 퀸스타운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죠. 내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나보고 모스번에 가서 사업(?)을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10년 정도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으려고 했는데, 잘됐다 싶었지요. 그 길로 물설고 낯설은 모스번으로 들어갔어요.”

 원래 모스번은 탄광 마을이었다. 일확천금까지는 아니었지만 제 식솔 하나쯤은 충분히 건사할 수 있는, 돈이 마르지 않던 곳이었다. 1백 년 전 찬란했던 영화는 찾아볼 수 없고, 지금은 바람조차도 건조한 오지 중의 오지로 남아 있다. 그나마 밀포드 사운드가 아니었다면 하루 내내 몇 사람 만나기 힘든 삭막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여섯 달을 가게에서 유령처럼 지내

 제임스는 들뜬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뉴질랜드에서 10년이 넘게 사업을 해왔는데 그까짓 휴게소(데어리) 하나 못 할까하는 자신감도 있었다. 한 달간의 인수인계 절차가 끝나고 드디어 제임스 권 이름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새벽 여섯 시에 기상, 일곱 시면 첫 손님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명색이 주인임에도 전혀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었다. 돈을 주고받는 계산대에 동네 출신 키위 여종업원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이유는, 영어 탓이었다. 제임스가 영어를 못한다는(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로) 점을 들어 내쳤다. 계산대에서 쫓겨난 제임스는 주방에서도 밀렸다. 쉬운 말로 안 보이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제임스는 물론 그의 부인도 가게에서 유령처럼 지내야 했다.

 “완전 주객이 전도된 셈이었지요. 전 주인에게 가게를 물려받으면서 일하는 직원 네 명도 다 인수했어요. 우리 부부가 그쪽 일 경험이 없어 어쩔 수 없었지요. 그런데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어요. 누가 주인인지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가게 인수 후 여섯 달, 제임스는 마침내 벼르고 벼르던 칼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주인장의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달력 한 장 찢어 직원에게 해고하겠다통보

 다음은 그때 그 길고 긴 얘기를 짧게 정리해 본 것이다.

 제임스는 키위 직원들에게 경고(Notice)를 날렸다. 달력을 한 장 찢어 이러이러하면 2주 후에 해고하겠다, 하는 통보를 했다. 그 다음 날, 직원 3명이 출근하지 않았다. 일손이 달린 것은 당연한 일. 커피 한 잔 타 본 적 없고, 햄버거 한 번 뒤집어 본 적이 없는 제임스는 당황했다. 담배 이름도 외우지 못한 채 눈치 하나로 손님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면서 일을 배우고, 참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종업원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제임스는 속으로 키위들은 정말로 신사 숙녀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그의 집 우체통에 낯선 우편물이 한 통 들어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보낸 것이었다. ‘~~불라불라, 불법 해고를 했으므로 한 명당 얼마씩을 지급하지 않으면 곧바로 법정에 세우겠다는 편지였다.

 구두 경고, 서면 경고(1, 2, 3차 최종)도 없이 해고하겠다고 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 제임스는 직원들을 자르겠다는 생각보다는 조금 겁을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뉴질랜드 노동법을 전혀 몰랐던 그는 맥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소송은 1년을 끌었다. 75천 달러(3)를 합의 끝에 25천 달러로 낮췄다. 변호사 비용은 별도였다. 수업료치고는 너무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를 계기로 독하게 영어 공부에 몰두하게 됐다. 최종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이때 어울릴 듯하다.

 

동네 모든 사람이 제임스 영어 선생 역할 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어쩌면 이 속담은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남섬 오지 마을인 모스번의 강산은 그렇지 않다. 10년 아니 1백 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곳에서 제임스 역시 늘 그 자리를 지키며 10년을 넘게 버텨왔다.

 모스번 휴게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정말로 눈이 온다) 일 년 365일 가게 문을 연다.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하루 열두 시간 영업한다. 일이 끝나도 어디 딱히 갈 데도 없다. 그저 자연을 벗 삼아 도(?)를 닦는 수밖에 없다. 가 제임스에게는 영어였다.(자세한 내용은 다음 편에)

 그가 모스번에서 일하며 보낸 시간을 따져봤다. 하루 열 시간으로 계산해 10년 치를 내봤다. 무려 36,500시간이나 된다. 그 솜털보다 많은 시간 가운데 상당 시간을 제임스는 영어에다 썼다. 영어의 한을 풀어보겠다는 뜻이었다.

 “동네 모든 사람이 다 내 영어 선생이었어요. 다섯 살 짜리 꼬맹이부터 여든 할머니까지 영어를 할 줄 하는 사람이라면 팔을 잡고 묻고 또 물었어요. 내 영어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요.”

 ‘하우 아 유?’(How are you?) 같은 가장 기본적인 영어 몇 마디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그는 서서히 영어에 자신감을 느끼게 됐다. 영어의 원리 원칙을 깨달으면서부터이다. 그러면서 영어에 맺힌 한을 후대에까지 이어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 산골 오지에서 10년을 훌쩍 넘게 버틴 이유도 어떻게 보면 그 영어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임스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다는 소문 퍼져

 제임스는 모스번의 유지이다. 마을 행사 때마다 그는 빠지지 않는다. 반상회 같은 소소한 모임부터 총리가 참석하는 근사한 자리까지 지역 사회 일원으로 제 역할을 다해 내고 있다. 그는 절대 몸만 가지 않는다. 가게 물품을 기증하거나 어니스트 러드포드 초상화가 새겨진 지폐($100)를 아낌없이 내놓는다. 지역에서 번 돈을 지역을 위해 쓰겠다는 의지가 있어, 지금까지 큰 탈 없이 모스번에서 터를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가 이 산골에 와서 놀란 게 하나 있어요. 겉으로 봤을 때는 초라하게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알차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교육, 의료, 응급 상황 등 모든 면에서 꼭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지요. 정말로 뉴질랜드는 선진국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해요.”

 앞서 말한 직원 해고 사건을 계기로 그는 모스번에서 유명해졌다. 속된 말로 제임스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다는 소문이 퍼졌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직원 3명을 한 칼로 베어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는 그때의 서슬 퍼런 기억보다 지역 사회 유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임스는 얼마 전, 인생 중년 오십 대를 다 보낸 휴게소 일에서 손을 뗐다. 영어 공부를 더 체계 있게 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어서였다. 가게 열쇠를 건네며 아들에게 말했다.

 “3년만 버텨라. 그러면 10년도, 30년도 해낼 수 있다.”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 시베리아의 범은 이제 사냥을 마쳤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겼고, 제임스는 살아서 이름을 남겨야만 했다.   

 

뉴질랜드 차로 일주, 남북평화 대장정 나서

 ‘태극기 휘날리며.’

 제임스가 모스번에서 석 달 넘게 자리를 비운 적이 있다. 2012년 북한의 핵 문제로 한반도의 위기가 극에 달할 때였다. 그는 두고 온 고국을 생각하며 남북평화 대장정에 나섰다. ‘순간 포착-세상에 이런 일이벌어졌다.

 그는 남섬 끝인 스튜어트 아일랜드(Stewart Island)부터 인버카고, 퀸스타운, 크라이스트처치, 웰링턴, 타우포, 해밀턴을 거쳐 오클랜드까지 34일 달리고 또 달렸다. 차에는 태극기와 뉴질랜드 국기가 펄럭였다. 미리 준비한 광목천에 키위들로부터 남북한 통일을 바라는 서명을 받았다. 40m가 넘었다. 럭비운동장 반 만한 길이었다.

 그 기세를 몰아 제주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올라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저런 문제로 태극기 깃발은 오클랜드 마운트 이든(Mount Eden)에서 멈춰야 했다. 자기 돈 3천만 원을 들였다. 웬만한 애국심으로는 할 수 없는 고귀하고 숭고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뉴질랜드에 있다는 것을, 한국 정부는 과연 알고는 있을까 하는 조금은 쌉싸름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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