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3-4) 권영진 대표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이민 열전(3-4) 권영진 대표

일요시사 1 2755



모스번(Mossburn) 휴게소 권영진 대표 

일요시사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10년 이상 한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럼스덴 캠프장에는 알파카 아홉 마리가 산다. 캠프장 손님들의 귀한 친구이기도하다.

“나는 영어에 미친 사람입니다”

10년 공부 끝 교재 한 권 펴내…’네 시간의 기적’ 맛보게 해주고 싶어

“남섬 모스번에서 그와 함께한 3박 4일의 대부분을 영어 얘기로 보냈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내게 수시로 전화를 걸거나 메일을 보내 영어를 설파했다. 쉬운 말로 ‘제대로 된 

영어교육을 한 번 해보자’는 주장이었다. 한 남자가, 그것도 예순이 넘은 남자가,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참 영어교육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의 삶이, 생각이 섹시하게 

느껴졌다.”(발문)



<지난 호에 이어>

휴게소를 찾아온 모스번 초등학교 교장, 제임스 영어 공부에 큰 힘이 되어줬다.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라는 뜻이다. 무슨 일을 이루려면 그 일에 미쳐야만 한다. 

그것도 ‘제대로’ 말이다. 대충 미쳐서는 꿈을 이룰 수가 없다. 역사 속 수많은 사람 가운데 정말로 미친 사람만이 그 어떤 식으로든 역사를 만들어 냈다.

 어렸을 때 헛간에서 알을 품고 있었던 에디슨은 미친 사람이었다. 새처럼 사람도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었던 라이트 형제, 지구촌 모든 사람이 컴퓨터를 한 대씩 손에 들고 다닐 거라고 했던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언가에 미친 사람이 있었기에 세상은 좀 더 역동적으로 변했다.

럼스덴 캠프장 입구, 이곳에서 제임스는 하루 열두 시간 책을 쓰고 있다.
 

제임스 권(권영진)은 ‘미친 사람’이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단어가 ‘영어’이다. 돈 얘기를 자주 하는 사람은 돈에 미친 사람이고, 사랑 얘기를 주로 하는 사람은 사랑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 주야장천 영어 얘기만 하는 제임스는 ‘영어에 미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남섬 모스번에서 그와 함께한 3박 4일의 대부분을 영어 얘기로 보냈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내게 수시로 전화를 걸거나 메일을 보내 영어를 설파했다. 쉬운 말로 ‘제대로 된 영어교육을 한 번 해보자’는 주장이었다. 한 남자가, 그것도 예순이 넘은 남자가,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참 영어교육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의 삶이, 생각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영어 집중 위해 모스번 휴게소 은퇴해

 제임스는 모스번 휴게소를 13년째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 실질적인 살림을 아들 손에 맡겼다. 일선에서 완전히 은퇴한 셈이다. 은퇴 이유는 단순하다. 영어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그에게 영어가 뭐길래…

 “나만큼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거예요. 한국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오로지 영어로만 승부를 겨뤄야 했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니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이를 악물고 해도 발전이 없었어요. 오랜 고민 끝에 내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면서 다음 세대는 영어로부터 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는 마음을 가졌지요.”

제임스가 그동안 써온 영어교재 원고 초고 묶음.

 모스번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 못 했다. 가게에서도, 골프 모음에서도, 지역 사회 미팅에서도 별말을 할 수 없었다. 간단한 단어도 그들 귀에 닿지 않았다. 허공에 떠도는 영어,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쓸쓸한 독백이었다. 자연스럽게 주눅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앞서(이 글 3편) 얘기한 직원 불법 해고로 거액의 수업료를 낸 후 대오각성을 하게 됐다. 일종의 ‘유레카’(‘알았다’라는 의미. 뜻밖의 발견을 했을 때 외치는 것)였다. 영어의 새 장 뿐만 아니라 제임스 인생의 새 전기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모스번 주민은 물론 휴게소를 들르는 손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하루가 다르게 영어 실력이 늘었다. 시베리아의 범 같은 아니, 모스번의 범 같은 기질도 한몫을 했다. 거친 영어의 세계에서 소리 없이 ‘어흥’하며 한 발 두 발 앞으로 나아갔다. 그깟 영어는 풀 죽은 토끼나 다름없었다.

 

모르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못해

 제임스는 집요한 면이 있다. 모르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영어 관련 전공자도 아니고, 뉴질랜드에서 체계적으로 영어 공부를 한 적도 없다. 해결책은 무조건 묻고 또 묻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답이 나온다. 새 세상이 보인다. 그렇게 하루하루 정력과 시간의 품을 팔아 영어의 고지를 향해 진군했다.

 “모스번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오타고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지인의 도움이 컸어요. 그 분들은 내 부탁이라면 맨발에라도 나오시곤 했지요.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찾아가도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고 궁금증을 풀어 주었어요. 정작 본인도 모르는 문제라면 대학교수에게 전화를 해 답을 알려주곤 했지요. 정말 내게는 소중한 영어 은사들이지요.”

 제임스의 영어 투쟁기는 이 짧은 지면으로 다 소개할 수 없다. 강산이 변한다(모스번의 강산은 안 변해도, 제임스의 영어는 상전벽해를 이뤘다)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숱한 시간을 썼다. 그 사이, 장발 머리가 대머리(?)로 바뀌었다. 그의 마음고생이, 영어에 대한 열정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의 사무실에는 각종 자료가 이곳저곳에 널려 있다. 다 영어와 관련된 것들이다. 영어 사전과 교과서 수십 권을 포함, 일본어, 중국어, 불어, 독어 등 전 세계 언어 관련 책들이 눈에 띈다. 영어로만 한정하지 않고 다른 언어를 통해 신 영어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이다.

 

모발폰에 영어 학습 관련 사진 산더미  

 모발폰 사진함에도 다양한 자료가 있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무조건 기록으로 남긴다. 그리고 아무에게나(주로 파케하 키위) 묻는다. 왜 그래야 하냐고. 그것이 길가에 대충 세워진 표지판일 수도 있고, 과자 봉지 뒷면에 있는 달콤한 홍보물일 수도 있고, 또 지역 신문에 난 촌스러운 광고일 수도 있다. 그에게는 정지해 있는 모든 영어가 훌륭한 참고용 역할을 한다. 산 넘고 물 건넌 제임스의 10년 영어 투쟁기는 지난해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됐다. 제목은 소박하게 유치한 ‘세종 대왕 새 한글 English’. 부제는 ‘한문 사대부 영어 역사 50년을 뒤집는 Korean English KU-DE-TA’를 달고 있다. 제목과 부제에서 제임스가 꿈꾸는 영어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내친김에 그의 생각을 조금 더 들어보자. 책 머리말 일부이다.

 “이 한 권의 책은 2014년 10월 9일, 568주년을 맞이하는 세종 대왕의 한글날 세종문화회관에서 완벽한 소리글자 한글을 사랑하고 영어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people을 위해 ‘나눔의 책’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한 권의 책은 책장에 꽂아 놓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을 보시고 난 후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가슴으로 느껴지는가? 뉴질랜드 교민 제임스 권의 영어 사랑 열정을 말이다. 제임스는 자기 돈으로 이 책을 1천 권 발행,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과 교육부, 방송국 등 관계 기관에 보냈다. 한국의 영어 교육이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는 피 끓는 절규의 몸짓이었다.

지난해 펴낸 책, 1천 권을 무료로 보급했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하지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나는 내가 가는 길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실생활에서 전혀 쓸 수 없는 한국의 영어교육은 바뀌어야 해요. 특히 10~20년 후 한국의 주인공이 될 미래 세대를 생각한다면 더 절실하고요. 그저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싶을 뿐이지요.”

 

앞으로 책 대여섯 권 더 펴내겠다’ 다짐

 제임스는 이 책의 원고를 기초로 킌스타운, 크라이스트처치, 로토루아, 오클랜드를 한 달을 돌며 교민 집회를 가졌다. 1년간 교민신문의 한 지면을 사서 전도에 나서기도 했다. 다 자기 돈을 들여서 한, 일종의 애국이었다.

 보통 어떤 일이든 10년 정도 하면 포기하거나 원숙해지거나 둘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뉴질랜드 교민 사회는 주로 ‘포기’ 쪽이 많다. ‘내려놓는다’는 그럴듯한 표현을 쓰긴 하지만, 냉정하게 얘기하면 그 정도 선에서 그만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는 역사를 만들 수 없다. 질박한 이민 역사에서 한 길을 외곬으로 가는 사람이 많아야만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성공과 실패의 판단은 후세에 맡기면 된다. 사는 동안, 해봐야 한다. 그게 사람 개개인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생각한다.

 제임스는 얼마 전 한국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한글날에 맞춰 들어갈 계획이다. 목적은 영어 보급. 그때 두 번째 책이 나올 예정이다. 무료로 보급할 마음을 갖고 있다. 역시 자비 출판. 그 무엇에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이다.

 “앞으로 대여섯 권의 책을 더 펴내려고 해요. ‘뉴질랜드 촌놈 제임스의…’ 뭐 이런 제목으로 하려고요. 그때도 내 돈을 들여 만들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하든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죠. 내가 말주변도 없고 글주변도 없지만 심지 만큼은 분명해요. 이 글을 읽는 많은 분이 심정적으로 후원해 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경북 영주가 고향인 제임스는 내년 초쯤 본격적인 영어 전도사로 나설 예정이다. 그곳에서 특별한 강의를 해 나가려고 한다. 일명 ‘네 시간의 기적.’ 우리의 생각이 아닌 영어권 사람들 생각으로 말문을 열고, 말의 순서를 바꾸고, 질문하고, 대답하는 식의 강의로 딱 240분 만에 끝내주겠다는 뜻이다. 정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어에 흥미를 갖게 해줘, 전 국민 모두를 영어 스트레스에서 해방해주는 전도사가 되어 보겠다는 포부이다.

럼스덴 캠프장에서 하루 12시간 글쓰기에 매진 모스번 휴게소에서 차로 20여 분을 달리다 보면 럼스덴(Lumsden)이라는 고즈넉한 마을이 나온다. 제임스는 그곳에서 조그만 캠프장을 위탁, 운영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여행자들이 텐트를 치고 하루 또는 며칠을 보내는 공간이다. 주인이라고 해서 딱히 할 일도 없다. 하루 한두 차례 돈을 받거나 시설물을 돌보면 된다. 

그 자유 공간에서 그가 하는 일은 오로지 ‘책 쓰기’이다. 하루 열두 시간 넘게 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인생 역작까지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그의 영어 사랑 열정 10년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리라 믿는다. 그 무엇을 쓰는 자는, 역시 섹시하다.

 이제 제임스 권(권영진)의 얘기를 마치려고 한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그가 나에게 보여준 삶의 열정은 크게 본받을 만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무엇에 미쳐(狂)있는 사람, 그래서 꼭 그 목적지에 미치기를(及) 진심으로 바란다.

 후기 하나.

 원고를 마치려는데 그에게서 사진 한 장과 함께 문자가 왔다. 그가 캠프장에서 키우던 알파카 한 마리가 사경을 헤맨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보낸 문자에서 눈물이 보였다. 나는 그의 눈물에서, 시베리아 범의 고독을 느꼈다.<끝>        

글_프리랜서 박성기




1 Comments
김담원 2015.09.0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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