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더
오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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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3:06
퇴근 무렵, 한 손님만 더 받고 일을 마치려던 참이었다. 온종일, 늦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바람에 차 안에만 있다 보니 누적된 피로감이 뼛속까지 젖어들었다. 도메인을 지나는데, 오클랜드 병원 손님을 태우라는 전화가 울렸다. 가여운 체구의 할아버지가 잎이 다 떨어진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훅 부는 바람에도 날아갈 듯 연약해 보였다. 조심스레 부축하여 안전띠를 채워드리는데 내 손을 살며시 쥐었다. 행선지 주소를 묻자 분명치가 않았다. 로얄옥 원트리 힐 쪽으로 가면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운전해 가면서 들어보니 할아버지 여건이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오늘 아침, 할머니가 빗길 계단에서 낙상을 한 바람에 다리뼈가 부러지고 허리도 다친 터였다. 응급으로 병원에 실려 오게 되어 병원에서 종일 함께 있다가 집에 돌아가시는 길이었다. 할머니는 82세, 할아버지는 81세 노령이었다. 자식들은 다들 출가하여 외지에서 살고, 두 분은 은퇴자 동네에서 단출하게 살고 계신듯했다. 고국의 연로한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노년이 되도록 오랫동안 별일 없이 소박하게 살아 오시다 이번에 이런 사고를 당하고서 엄청나게 당황하셨던 기색이었다. 미리 보여주는 인생 선배의 생활 한 장면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로얄옥 로타리에 도착해 방향을 묻자 손가락으로 왼쪽 캠벨로드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에 퍽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곧바로 올라가다가 약간 구부러지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된다고 했다.
그 거리 이름을 알려주면 찾기가 더 좋을 턴 데, 굳이 직접 알려 주겠다고 하니 믿고 따랐다. 말씀대로 올라가다 약간 굽어 보이는 길목에 이르러 꺾어질까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다시 왼쪽으로 해서 한 번 더 오른 쪽으로 꺾었다. 앞에 서있는 하얀 차 뒤에 차를 보더니 다 왔다고 요금을 냈다. 미터요금에서 우수리를 깎아주었다. 안전띠를 풀어드린 후 부축하여 내려드리니 어리숙한 표정이었다.
이제 퇴근인가 싶었다. 차를 돌려 막 나오려는데 “잠깐!” 하는 외침과 함께 차 트렁크를 “땅땅!” 쳤다. 할아버지께서 뛰어오시더니 다시 택시에 올라타시는 게 아닌가? 의아스러워하자 잘못 내렸단다. 가는 방향을 다시 알려주겠다고 연거푸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가리켰다. 한참을 그리하는 데도 내릴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렇게 다른 곳으로 몇 번을 헤매는데 을씨년스러운 비는 야속하게 더 퍼부었다. 어둠까지 몰려오고 가로등도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일 끝내고 따로 갈 모임이 있는 나 역시 속이 다급해졌다. 기도회에서 발표까지 있는 날이라 미리 가서 꽃도 준비하고 음료수도 마련해야 했다. 시간이 기약 없이 지체되니 노심초사해졌다. 실망과 짜증이 묻어 나오려 했다, 할아버지야 속이 오죽이나 타실까?
마음을 다시 추슬러가면서 차를 세우고 여쭈었다. 혹시 면허증이라든가 무슨 카드 같은 곳에서 행여 주소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보여 달라고 했다. 손을 내 저었다. 주소를 모르고 다니던 경험으로만 찾아가려 안간힘을 쓰는 마음이라니…… . 당황은 되고 기억력은 사라진 터라 할아버지 얼굴에 진땀이 배어 나왔다. “할아버지! 다시 원위치로 가 볼게요. 기억을 다시 한 번 잘 더듬어 보셔요.” 할아버지가 미안해하며 이번에는 다소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캠벨 로드를 빠져나와 로얄옥 로터리에 섰다. 다시 길 찾기를 시도했다. NG 난 영화 한 장면을 처음부터 다시 연기하는 기분 이었다. 할아버지 설명은 똑같았다. 비슷한 곳마다 들러 우회전으로 꺾어 들어가며 좌회전 그리고 우회전을 해봤다.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탕을 칠 때마다 할아버지 눈에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짙어서인지 눈물이 고일 듯 젖어 보였다. 속 타는 가로등이 세차게 눈물을 흩뿌리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여린 독백이 차 앞 유리창에 빗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할아버지께서 나지막하게 소리 낮춰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한 번만 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혹시나 싶어 로얄옥 로터리 쪽이 아닌, 그린레인 그레이트 사우스 로드 쪽에서 캠벨 로드 쪽으로 올라오면서 찾아보고자 다르게 접근을 시도해봤다. 할아버지가 얘기했던 방향과 반대로 약간 구부러지는 곳에서 우회전이 아니라 좌회전을 해서 또 우회전을 했다. 증표로 만날 하얀 차를 찾아서. 무슨 보물섬 지도를 찾는 임무를 띤 게임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하는 중에 허름한 집 앞에 서있는 하얀 차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 차 뒤야!”하고 할아버지께서 외치셨다. 예정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을 비 오는 거리에서 헤맨 후였다.
할아버지 눈에서 안도의 기쁨이 흘러나왔다. 모임에 늦어 내 몫을 못해 미안한 마음이면서도 한편으론 다른 몫을 한 듯해서 가슴이 젖어들었다. 미처 끄지 못한 택시 미터기, 요금을 보더니만 할아버지가 또 돈을 내려 지갑을 꺼내셨다. 됐다고 손사래를 치며 미터기를 껐다.나이 들어 오는 기억력 쇠퇴, 망각 증상이 무슨 죄가 될까? 비를 맞으며 종종걸음으로 들어가시는 할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가슴이 김장배추에서 빠진 소금물처럼 짠했다. 어쩌면 할머니 중심으로 사시다가 갑자기 할아버지 혼자 되니 퍽 당혹스러운 듯했다. 고국의 아버지 모습이 아스라이 겹쳐왔다.
기억력의 저편 너머로 세월이 흘러간다. 윈도우 브러쉬가 부산하게 움직인다. 빗물 따라 세월이 흘러 내린다. 흐르는 세월을 때론 못내 아쉬워하며 가슴 저리기도 한 이민 생활, 아물지 못한 상처투성이도 함께 씻겨 흘러내린다. 언젠가 행여 나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나에게로 가는 여행을 떠나듯이 달린다.
할아버지의 ‘한번만 더’에 마음 내려놓고 돌다가 가까스로 찾게 된 집, 할아버지의 안도해 하시는 모습이 여울물처럼 출렁인다. 그 풍경을 기억하며 내 삶의 구비구비 유유히 흐르고 싶다. 그래,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나를 포함한 다른 이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 보는 것이다.
“한 번만 더!”
저자 지금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