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23편] Journey Home

손바닥소설


 

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23편] Journey Home

일요시사 0 1920

요란한 광경이 병원 쪽을 덮쳤다. 엠브란스 경적과 불빛이 조용한 분위기를 얼음 깨듯 쫙 갈라놓았다. 

111 응급구조대원들이 신속한 동작으로 응급환자를 이동 침대에 눕혀 병상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초를 다투는 운동경기 선수들 같았다. 산소 호흡기까지 찬 걸 보니 심각한 모양이다. 

살다 보면 어느 날 느닷없이 날벼락 맞는 일이 생기는 세상.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T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T가 리셉션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노스쇼 하스피털, 에머전시 병동. 벌써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일요일 밤 11시쯤 들어와서 피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거 아닌 줄 알고 며칠을 그냥 지내왔던 게 잘못이었을까? 지난주 퇴근 후, 패킨세이브에 장 보러 들렀다가 나오며 계단에서 발을 잘못 디뎌 나가떨어졌다. 오른쪽 장딴지 근육이 놀랐는지 욱신거렸다. 겨우 집에 돌아와 부은 종아리와 발등에 얼음찜질을 했다. 붓기를 가라앉히는 데 좋다는 호랑이 연고를 바르고 잤다. 다음 날, 좀 아파도 견딜만해서 출근했다. 그러길 일주일. 여전히 붓기가 줄지를 않았다. 

 

아내는 남섬 크리이스트 처치에 있는 딸네 집에 다니러 간 사이였다. 손녀를 낳은 딸 산후조리를 돌보러 간 터라 당분간 혼자 살기를 하는 중. 저녁에 밑반찬을 들고 집에 찾아왔던 친구 L이 T 장딴지와 발등 붓기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빨리 글렌필드 화이트 크로스 에머전시 가서 의사 진단을 받아보라고 충고했다. 친구 말대로 바로 의사 진료를 받으러 가니, 의사가 악화할지 모르는 염증을 염려했다. 즉시 노스쇼 에머전시로 가서 먼저 피검사를 받으라고 레터를 써줬다. 결과에 따라 초음파 검사, 울트라사운드도 해야 할 거라고 했다.

 

T는 혼자 살기를 하는 요즘, 단순해졌다. 처음엔 외롭고 불편했다. 3주가 되어가면서 어지간하면 참고 살려는 생활이 몸에 배어갔다.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궁금하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지긋이 빠져보는 시간이 편안했다. 병원에서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신비한 체험 세계로 여행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병원에 급하게 드나드는 응급환자를 보며 그네들 생활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다. 딴 세상을 사는 움푹 진 모습들이 생생한 인간으로 다가왔다.

 

요란한 광경이 병원 쪽을 덮쳤다. 엠브란스 경적과 불빛이 조용한 분위기를 얼음 깨듯 쫙 갈라놓았다. 111 응급구조대원들이 신속한 동작으로 응급환자를 이동 침대에 눕혀 병상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초를 다투는 운동경기 선수들 같았다. 산소 호흡기까지 찬 걸 보니 심각한 모양이다. 살다 보면 어느 날 느닷없이 날벼락 맞는 일이 생기는 세상.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T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10여 분 전에는 교통사고 환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실려 왔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 심장질환 환자에 피범벅이 된 외상환자를 보다 보니, 하루하루 무난히 보내온 날들이 달리 여겨졌다. 예정된 줄 모르고 맞닥뜨리는 사고에 사람들은 얼마나 혼비백산하고 마는가?

 

응급 병동 리셉션 대기실 벽에 걸려있는 화면 스크린에 여러 안내 사항을 보여줬다. Emergency Departments treat people who have a serious illness or injury that requires urgent attention. We are here to make your journey as comfortable as possible. T는 Journey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홀로 Journey를 하는 시간. 오늘 일은 견딜만한 일이라서 멀리 산후 조리하러 간 아내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손녀를 낳은 딸아이가 알아도 걱정할 것 같아 카톡 문자 같은 것도 안 보냈다. 아이에 신경 쓸 일도 많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들고 간 책을 펼쳐보다가 눈이 멎은 에머슨의 글귀가 가슴에 꽂혔다. Life is a journey, not s destination. 촌철살인의 활어(活魚)가 따로 없었다. 인생이란 하나의 여정이지, 어떤 목적지가 아니란다. 

 

실제 화면으로 급하게 바뀌었다. 에머젼시 환자가 급하게 들이닥쳤다. 배를 움켜쥐고 얼굴은 죽을상인 중년의 중국 남자가 부축을 받고 오다 고꾸라졌다. 장 출혈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결석이 소변 길을 막기라도 한 걸까. 험난하고 거친 파도였다. 곧 병상 안쪽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이어서 젊은 부부가 병상 안에서 나왔다. 갓난아이를 바구니에 넣은 채, 들고 걸어 나오는 얼굴에 안도의 기운이 어려있었다. 부드러운 물결이 일었다. 다행이었다. 새벽 두 시가 다 돼가는 시간. 늦게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젊은 부부의 Journey Home, 귀가(歸嫁)여정에 행운을 빌었다.

 

T의 멍 때리기 시간은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옛날로 갔다. 해가 뜨면 벌떡 일어났다. 아침 먹고선 일터로 나갔다. 땅을 파고 땀을 흘렸다. 노곤하면 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지면 집에 돌아왔다. 씻고 저녁을 해먹었다. 음식 맛이 꿀맛이었다. 노곤한 몸 누이면 곤히 떨어졌다. 잠도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머리가 복잡하지 않았다. 몸을 많이 썼다. 자고 일어나면 폭포수처럼 개운했다. 생활이 퍽 단순했다. 라디오를 듣고 상상하는 맛이 좋았다. 혼자래도 좋았다. 내 공간과 시간이 많았다. 여지를 품고 살았다. 옛날엔 그랬다.

 

현재로 날아왔다. 문명의 이기 속에 생활은 편했다. 없는 게 없었다. 돈이면 다 됐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했다. 마음을 많이 썼다. 몸은 퇴화하였다. 머리는 ET처럼 커졌다. 생각이 많아졌다. 서로 경쟁했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졌다. 혼자 가만히 있으면 바보가 됐다. 비록 몸은 쉬는 것 같아도 마음은 더 바쁘게 움직였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쉴 곳이 없었다. 손바닥엔 현대판 도깨비방망이를 하나씩 품고 살았다. 스마트폰 도깨비는 온 세상을 한 눈으로 보고 들었다.

 

또 한차례 응급실 바깥문이 열리면서 찬 바람이 휙 일었다. 구부정한 아버지를 모시고 한 청년이 힘들게 들어왔다. 몇 마디 리셉션에 이야기하니 바로 휠체어를 준비해 주었다. 젊은이가 앉았다. 구부정한 아버지가 뒤에서 휠체어를 밀며 병상 안으로 들어갔다. 언뜻 보는 것만으로는 모르는 세상이었다. 도움을 받을 이는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정작 도움을 받은 이는 아들이었다.

 

새벽 두 시 반. 드디어 T 앞에 젊은 의사가 나타났다. 자기 이름은 제임스라고 소개하며 의사 방으로 안내했다. 검사 결과를 설명해주는 의사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차트를 훑어봤다. 부풀어 오른 T 발등과 종아리를 조심스레 만져보고 눌러보았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T 왼쪽 배에 주사한대 놓으며 앞으로 똑같이 따라 해보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주사구입 처방전을 줄 테니 약국에서 사, 매일 밤 한 대씩 직접 놓아보라고. 염증 확산 방지인가 싶었다. 약을 처방해주는 게 아니라 주사를 직접 놓아보라고? T가 의아한 눈으로 의사와 간호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내도 없는 집에서 밤에 혼자 배에다 주사를 직접 놓는다? 별 별일이 다 있구나 싶어 T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진료 결과 소견서를 써주며, ACC 초기 진료했던 곳에 가서 다시 안내를 받아보라고 했다. 울트라사운드 초음파 검사를 받을 거라고 했다. 

 

T가 에머젼시 병동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 3시였다. 4시간 만에 귀가였다. Journey Home! 세상은 촉촉하게 비에 젖어있었다. 가로등 불빛만 쓸쓸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병원 밖 길가에 세워둔 차가 오랜 시간 그대로 서서 주인을 기다렸다. 불현듯 T 가슴에 반가움 같은 게 번졌다. 손으로 차를 톡톡 두드려줬다. 차를 몰아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이층 거실 창밖으로 가녀린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집을 나서기 전 켜둔 센서 등이 약한 조명으로 반겼다. 

 

새벽에 모든 것은 다 홀로였다. 함께 해주는 이 없어도 저마다 자기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길을 밝혀주는 도로 가로등, 주인을 기다리는 차, 불을 밝히고 있는 집, 길가의 나무들. 때로는 같이 또는 함께. 그리고 홀로 하는 시간. T는 거실로 들어와 병원에서 준 서류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물 한잔을 따라 마시며 거실 창밖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한참을 뜨거운 물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세상이 흘러내렸다. 평소 일찍 근무하는 날이면 일어났던 4시가 가까워져야 잠자리에 들었다. 특별한 Journey, 하루였다. 천정에 붙어놓은 야광 별빛이 은은하게 가물거렸다. *

 

 

LYNN :소설가. 오클랜드거주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8-12-12 09:30:10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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