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일요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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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13:22
부동산은 없고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動産) 상자 한 달 만
에 풀어보니
마주앙 백포도주 5병,
호주산 적포도주 1병,
짐빔(Jim Beam) 반 병,
품 좁은 가을꽃 무늬 셔츠 하나,
잿빛 양말 4켤레.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가족 모두 집 나간 오후
꼭 끼는 가을꽃 무늬 셔츠 입고
잿빛 양말 신고
답답해 전축마저 잠재우고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
물 칠한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실란(蘭)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
올라봐야 별볼일 있겠는가,
그는 꼿꼿해진 생각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
저녁 햇빛이 눈 높이로 나무줄기 사이를 헤집고 스며들어
베란다가 성화(聖畵) 속처럼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어느샌가 실란이 배경 그림처럼 사라지고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저자 황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