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4-1) 남국정사 주지 동진 스님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이민 열전(4-1) 남국정사 주지 동진 스님

일요시사 0 1454

일요시사는 뉴질랜드 이민 열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공과(功過)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견해가 있을 있다. 하지만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차 한 잔에 우주가 담겨 있다

불교는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서로 나누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불교는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환경, 생명, 평화가 살아 숨 쉬는 뉴질랜드는 불교의 정신을 잘 찾아볼 수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상이 늘 지켜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쉽게도 아시안 이민자들로 인해 뉴질랜드가 조금씩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좀 듭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 경각심을 갖고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데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합니다.”

 

다탁 위에 놓인 보랏빛 도라지 꽃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차 한 잔 하시지요?”

 스님은 자비로운 웃음을 띠며 내게 차부터 권했다. 여름 끝자락, 오후의 맑은 햇살이 방 안까지 밀려 들어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번다한 도시 생활에 찌든 나는 몇 초를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스님, 이 꽃 이름이 무엇인가요?”

 다탁(茶卓) 위에 있는 꽃 한 송이가 내 눈을 끌었다.

 “도라지 꽃입니다.”

 스님은 이런 꽃은 처음 봤지요?’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라지 꽃이요? 정말 예쁘네요.”

 보랏빛 도라지 꽃 한 송이가 방 안을 운치 있게 해 주었다. 아주 어릴 적 경기도 포천 시골에서 동무들과 뛰놀다가 우연히 본 바로 그 도라지 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을 느꼈다. 꽃 한 송이가 내게 준 평안, 그것은 이제 대화를 나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 대화(對話) 말이다.


 

차 한 잔, 두 잔에 서서히 취해

 스님은 나를 위해 정성껏 차를 우렸다. 찻잎을 덜어내는, 물을 따르는, 차를 건네는, 손동작 하나하나가 내게는 신비롭게 다가왔다. 그 어떤 도()가 느껴졌다.

 “, 한 잔 드시지요? 이게 지리산에서 자란 우전차(雨前茶)입니다. 곡우 전에 딴다고 해서 우전차라 부르지요. 겨울의 모진 한파를 이기고 나온 새순을 따서 만든 찹니다. 맛 있을 겁니다.”

 나는 찻잔을 받아 한 모금 깊게 마셨다. 입속에서 돌돌 도는 연한 맛이 도시 생활에 찌든 잡미를 몰아냈다. 스님 말씀처럼 차 맛은 달고 부드러웠다.

 “참 좋네요. 한 잔만 더 주세요.”

 나는 한 잔, 두 잔 차에 취했다. 나랑 종교(나는 모태 기독교 신자다)가 다른 스님을 만난다는 경계심도, 어쩌면 기사로 만들만한 아무 내용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다 사라졌다. 우전차 한 잔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

 “박 선생, 차의 정신을 좀 들어 보실래요?”

 스님은 느닷없이 내게 강의(?)를 시작했다. 우전차 석 잔에 이미 취해 있었던 나는 왜 스님은 차를 좋아하시게 됐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날 특강을 독자들과 함께 나눌까 한다.

 한자 ’()풀 초’()나무 목’() 사이에 사람 인’()이 들어가 있는 모양새로 되어 있다. ‘은 부드러운 것을, ‘나무는 강한 것을 뜻한다. ‘사람이 그 사이에 있다는 것은 너무 부드럽지도, 너무 강하지도 말라는 의미다. 부드러울 때는 부드럽고 강할 때는 강하지만 한 쪽에 기울지 말고 균형을 유지하라는 뜻이다. 차의 정신은 중정’(中正)이다.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곧고 바름을 말한다.

 정치가나 사업가들이 차를 많이 마셔 중정의 이치를 체험했으면 좋겠다. 사람을 한순간에 취하게 만드는 폭탄주 같은 독한 술보다는 깊은 향을 느끼며 진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해 주는 차를 가까이하면 사회가 더 맑아지리라 믿는다.

 차를 마실 때 사람이 못 하는 게 있다. 바로 남을 흉보거나 욕을 하는 것이다. 분위기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비방하기가 쉽지 않다. 차를 나누며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는 평화다.

 반면에 술은 사람의 마음을 좀 풀어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사이 툭툭 튀어나온 거친 말 때문에 나중에 더 사이가 안 좋아지곤 한다. 가슴 속 응어리는 결코 독한 술로 풀 수 없다. 진정한 마음이 오가는 따듯한 차가 훨씬 낫다. 차는 소통이다.

 차는 무엇보다 격()있게 마셔야 한다. 그러려면 다구(茶具, 차를 끓여 마시는 데 쓰는 도구), 다화(茶花) 같은 여러 가지를 알아야 한다. 서화, 공예, 미술, 음악도 차의 격을 더해 준다. 차는 음악으로 치면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차가 문화의 꽃이라고 믿는다.

 스님의 차 강의는 그칠 줄 몰랐다. 한국의 차 종류부터 중국과 일본의 명차(名茶)까지, 유럽의 차 문화부터 차마고도(茶馬古道,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교역로, 영어로는 Tea Road라고 한다)의 역사까지 줄줄 꿰차고 있었다. 한두 해 차력(茶歷)이 아닌 게 분명했다. 나는 서서히 차 맛에, 스님의 말씀(때로는 법문)에 빠져 들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스님을 다섯 차례 만났다. 스님은 만날 때마다 차를 직접 우려 내게 건넸다. 쓴 커피는 입에 한 모금도 안 댔다. 참새의 혀처럼 부드럽다는 작설차(雀舌茶), 중국의 명차라는 보이차()를 주로 마셨다.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기 힘들었다. 스님과 나는 깊은 대화에 빠졌다.

 차 한 잔에 이제 우리가 됐다. 그 어떤 질문도 거북해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가슴 속에 담아둔 문제를 하나둘 꺼냈다. 스님은 그 어떤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반세기에 가까운 도력(道力)이 허투루 생긴 게 아니었다. 성직자는 역시 달랐다.

 스님은 무엇보다 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박 선생, 라면 국물 한 컵을 생수로 바꾸려면 물을 얼마나 써야 하는지 아시나요?

 내가 그걸 어찌 알겠는가.

 “잘 모르겠는데요. 한 백 컵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스님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생수 5천 컵을 부어야 합니다. 김치찌개는 1만 컵, 우유 한 잔은 5만 컵의 생수가 필요합니다.”

 스님은 지구 온난화를 크게 염려했다. 바로 사람의 탐욕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점 때문이었다.

 “연기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불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지요. 연기(緣起)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나의 말, 행동 하나가 다른 무엇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지요. 나의 말과 행위는 나 하나로 멈추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후대를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뉴질랜드, 불교 정신과 잘 어울리는 나라

스님은 그러면서 뉴질랜드는 불교의 정신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불교는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환경, 생명, 평화가 살아 숨 쉬는 뉴질랜드는 불교의 정신을 잘 찾아볼 수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상이 늘 지켜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쉽게도 아시안 이민자들로 인해 뉴질랜드가 조금씩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좀 듭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 경각심을 갖고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데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합니다.”

 스님은 또 나눔에 대해 강조했다.

 “교민 사회가 좀 더 많이 나누고 살면 좋겠습니다. 앞서 말한 연기처럼 사람은, 사업은 결코 홀로 살 수 없고 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고 있고, 또 누군가의 협력으로 사업이 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그 몫을 나누며 살아야지요. 교민 사회가 나름대로는 한다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가 10년 넘게 주지로 있으면서 느낀 점이기도 합니다.”

 스님이 대화 내내 강조한 또 다른 것은 종교의 사회적 책임이었다.

 “불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는 결코 사회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회, 다시 말해 사람 곁에 있지 않은 종교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종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회 정의와 인간의 행복, 그리고 인간의 구원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살아 있을 때 종교가 사회와 사람에게 친밀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쉽게 말해 사회 복지와 문화를 위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애인, 갈 곳 없는 노약자, 희망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에게 애정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사랑입니다.”

 

나는 하수였고 스님은 고수였다

 차 한 잔을 나누며 오고 간 대화는 좀 과장된 말로 우주의 모든 것을 담아 냈다. 교민 사회의 문제부터 종교가 추구하는 최고선은 무엇인지, 행복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며 죽은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지까지. 시인 고은과 화가 이중섭이, 철학자 니체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말 자리에 올랐다.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로마 시대부터 지구 최악의 재난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일본 지진까지. 그렇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횡과 종을 번갈아 가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끝없이 어설픈 질문을 던졌고,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했다. 나는 하수였고, 스님은 고수였다. 내게 동진 스님은 큰 스님이었다. 책으로만 만난 법정 스님이나 혜민 스님보다 내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모든 울림은 차 한 잔에서 시작됐다.<다음 호에 계속>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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