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5-1) 한인 역사의 산 증인 변경숙 씨
일요시사는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한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한복 입은 웰링턴 새댁’…
모든 것은 ‘오해’에서 시작됐다
잘 나가던 부동산 중개인 접고 1980년 국제 결혼한 뒤 뉴질랜드 비행기에 올라
“로이 윌슨의 편지를 받아든 경숙은 정중하게 거절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예의 바른 거절’은 ‘관심’으로 오해를 받았다. 이어 몇 번에 걸쳐 오고간 편지 속에서 ‘문화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한 편으로 신의 절묘한 한 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스무 해 전(1997년)이었다. 아니, 그를 만났다기보다는 그가 쓴 책을 먼저 만났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다. 한국에서 신문사에 근무하는 친구가 국제 전화를 했다. 영국계 키위 남자랑 사는 한국 여자가 책을 펴냈는데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했다. 친구는 내게 그 여자의 삶 자체가 한 편의 파란만장한 소설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보름 뒤 항공 우편을 통해 책을 받았다. 책 제목은《키위, 그래도 나는 한국 여자》(예영커뮤니케이션 펴냄). 표지에는 대학교수 같아 보이는 지(知)적인 여자가 있었다. 본문에 나오는 살벌하고 애잔한 내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아미가 넘치는 그의 사진만 봐서는 이 세상 누구 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여자로 느껴졌다.
250쪽이 조금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다. 그가 겪은 모진 설움에 가슴이 아팠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에 대한 자긍심에 박수를 보냈다. 내 기억에 그 책은 뉴질랜드 교민이 펴낸 최초의 수필집이었다. 내게, 그리고 수많은 교민에게 ‘뉴질랜드 이민 생활 안내서’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변경숙.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아~ 그 사람. 키위 할아버지와 사는 여자”라는 생각이 금방 떠오를 것이다.
브라운스 베이에서 스무 해 넘게 살아
지난 4월 초, 오클랜드 노스쇼어 브라운스 베이(Browns Bay)에 있는 변경숙의 집을 찾아갔다. 스무 해 넘게 오클랜드에 살면서 ‘한인의 날’ 행사장 같은 곳에서 더러 얼굴을 마주치긴 했지만 깊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저 얼굴로만 아는 사이였다.
“집 찾기 힘드셨죠? 변변치 못한 곳을 찾아 주셔서 고마워요. 커피 한 잔 준비할게요.”
거실에는 변경숙의 평생 반려자, 로이 윌슨(Roy Wilson)이 의료용 휠체어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어색함을 달래려 내가 “하이”하며 눈웃음을 건네자 그도 선한 웃음으로 인사했다. 거실 벽은 온통 사진과 표창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변경숙과 윌슨 씨 사이에 태어난 네 명의 자녀 그리고 여러 단체에서 준 기념패가 묵묵히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다과 준비를 끝낸 변경숙에게 내가 물었다.
“언제부터 이곳에서 사셨나요?”
충청도 사투리가 남아 있는 말투로 그가 대답했다.
“벌써 사 반세기가 다 되어가네요. 웰링턴에서 올라온 그다음 해인 1992년에 이 집을 사서 들어왔어요. 집 늘이는 재주도 없고 또 이사 가는 것도 귀찮아서 쭉 이 집에서만 살았어요. 남편이 워낙 보수적이라 뭔가 바꾸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도 랑기토토 섬이 잘 보이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닌가요?”
그렇다. 변경숙을 제대로(?) 만난 나는 우선 그의 소박한 집에서부터 글을 시작하고 싶다. 집을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사고파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린 이 현실이 나는 못내 서글펐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꿋꿋이 품위를 지켰다. 나는 그게 반가웠다. 그 무엇을 지키는 사람들, 그것이 ‘보수’일 수도 있고, 또 그것이 ‘신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변경숙과 그의 남편 로이 윌슨의 삶을 풀어내 보려고 한다. 나는 감히 그들을 ‘뉴질랜드 한인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하고 싶다.
충남 금산에서 삼(蔘) 집 큰딸로 태어나
변경숙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8월 25일 충청남도 금산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금산’하면 떠오르는 것은 인삼. 길가의 강아지도 인삼 뿌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인삼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경숙의 부모 역시 인삼을 재배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큰 규모의 삼 농사꾼이었다.
“어렸을 때 기억은 삼(蔘)밖에 없어요. 집 마당에 늘 삼이 널려 있었어요. 삼을 거둬들이는 칠팔월이 되면 마을 전체가 잔치 같았어요. 밤새 불을 켜놓고 삼을 닦고 말리고 하던 게 지금도 기억나요. 저희 오 형제는 다 삼 덕분에 교육을 받고 서울 생활도 할 수 있었어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립네요.”
경숙의 아버지는 첫 딸이 못내 아쉬웠던 것 같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바지만 입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당시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전 과목 과외 선생을 붙였다. 또래 학생은 모두 남학생이었다. 다 아버지의 돈으로 해결했다. 여자가 아닌 남자를 상대로 경쟁하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아버지의 뜻을 충족시켜주기라도 하듯 어린 경숙은 마치 유관순 언니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남학생이나 치마를 들춰 보는 개구쟁이 남학생들을 끝까지 쫓아가 응징했다. 경숙만의 ‘대한독립 만세’였다. 학교에서도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짱이었다. 그에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대학 방송국 PD 시절 ‘골프’로 경고받아
1971년 3월 그는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에 입학했다. 4년제 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유아교육과가 있던 대학이었다. 졸업만 하면 유치원 취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경숙의 생각은 온통 딴 곳에 있었다. 바로 학교 방송국이었다.
“학과 공부는 거의 안 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중앙대에서 유명한 동아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방송국이에요. 1학년 때 피디(PD)에 응모했는데 덜컥 합격했어요. 대학 시절 4년 내내 방송국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오전에는 사색 프로, 오후에는 음악 프로를 담당했죠. 자연스럽게 숱한 원고를 써야만 했어요. 그때 글 실력이 훗날 책을 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기억나는 건 골프에 관한 방송을 했다가 학교에서 경고를 받은 적이 있어요. 당시만 해도 ‘골프’ 하면 귀족이나 하던 때였는데 신성한 상아탑에서 그 방송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경숙은 대학 졸업 뒤 한 해 정도 유치원 교사로 일하다가 육영재단(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운영)에서 펴내던 잡지 <어깨동무>,< 꿈나라>의 편집 기자로 근무했다. 유아교육과 방송국 피디 경력에 딱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도 몇 해 하다가 때려치웠다.
다음 직업은 부동산 중개인. 꽃다운 이십 대 처자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물 설고 낯 설은 마산까지 내려갔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차로 20분 거리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하나뿐. 일찌감치 결혼한 친구가 진해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신의 오묘한 한 수’가 숨어 있었다.
‘거절 편지’가 ‘관심 편지’로 오해받아
대졸 출신의 고운 처자가 늙수그레한 노땅들 사이에서 경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또다시 유관순 언니의 기개가 떠올랐다.
“당시 마산에서 여자 부동산 중개인은 제가 처음이었어요. 대부분이 느끼한 중늙은이들이었지요. 그런데 괜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죽기 살기로 했어요. 나름 그 세계에서 이름을 좀 알리려던 차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어요. 제 운명을 가른.”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뉴질랜드에 사는 영국계 남자가 한국 여자랑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해양대학을 나온 친구의 남편이 바로 매치메이커(Matchmaker, 맞선 중개자)였다. 친구 남편은 배가 뉴질랜드(웰링턴)에 정박할 때마다 윌슨 씨의 도움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모두 ‘오해’(Misunderstanding)에서 비롯됐지만 그 얘기를 다 펼쳐놓기에는 이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
로이 윌슨의 편지를 받아든 경숙은 정중하게 거절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예의 바른 거절’은 ‘관심’으로 오해를 받았다. 이어 몇 번에 걸쳐 오고간 편지 속에서 ‘문화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한 편으로 신의 절묘한 한 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대 초, 국제결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관순 언니의 정신을 물려받은 변경숙은 부모와 일가친척 그리고 친구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결심했다. 19세기 조선 시대 규수도 아닌데 얼굴 한 번 안 보고 백년가약을 맺기로 마음먹었다.
식도 올리기 전부터 영주권 서류를 꾸몄다. 태어나고 자란 한국 땅을 떠나야 하는 날이 점점 가까워졌다. 1980년 봄 어느 날, 신랑 로이 윌슨이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키가 큰, 중후한(?) 남자가 아내를 품에 안았다. 변경숙과는 무려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장모와는 겨우 서너 달 차이(다행히 장모가 위다)인 중년의 노총각이었다. 웃픈(웃기면서 슬픈) ‘웰링턴의 한복 입은 새댁’ 얘기를 기대하시길.<다음 호에 계속>
글_프리랜서 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