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16편]; 안식년(安息年)
요즘 안식년(安息年)이라는 말도 부쩍 가슴 깊이 다가오데. 꼭 일 년을 푹 쉰다는 말보다 생각날 때,
내 마음 편하게 머무르고 싶은 곳에 있는 것.
쉬고 싶을 때 쉬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떠나고 싶을 때 휙 떠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선뜻 하는 것. 나를 위한 안식의 시간이지.
단 하루라도. 시간의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지. 오늘처럼 시간의 깊이가 중요하지. 이런 다 게 안식(安息)이라고 느껴져.
오늘 자네와 만난 것도 그런 면에서 보면 안식(安息)인 셈이지.
“우~와~ 추자도! 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 온 세상이 탁 트이네!”
“A 차장님! 뉴질랜드에서 오신 차장님과 함께 제가 추자도에서 낚시 하다니 꿈 같아요. 어서 월척도 하세요. 씨알이 굵어요. 얼추 이십오 년도 넘었지요?”
“S! 그러네. 이제는 그때처럼 회사 생활 하는 것도 아닌데. 차장님은 무슨? 그냥 형님이라 불러. 나이야 예닐곱 차인데 뭘. 나도 아우님으로 부를게. 괜찮지 않아?”
“그려도 되나요? 그럼 눈 딱 감고 불러봐요. 행님! 행님이 뉴질랜드 이민 갔다는 얘기는 진작 들었어요. 고국에 댕기러 와서 지가 사는 추자도까지 수소문해 찾아주시니 감개무량하지요.”
***
추자도! 주변 작은 섬들이 가래나무 씨를 뿌려놓은 것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그중에서도 바다낚시 포인트라는 새말 갯바위. S의 안내로 A는 해남, 보길도 아래 추자도까지 왔다. 그런가? 벌써 이십오 년 전이라니. 대기업 가전회사에 근무할 때 S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A는 회사를 대표해서 문상을 왔던 곳이다. A가 생산 현장 조립라인 부서장을 맡았던 당시 S는 현장 조장이었다. A는 이백여 명이 넘은 현장 부서원들의 경조사를 정성껏 챙겼다. 추자도가 고향인 S의 부친상에도 밤새워 다녀왔다. 경기도에서 전남 해남까지 차로 내려와 배를 타고 추자도까지 들렀다. 그때를 계기로 S는 A 부서장과 더욱 가까워졌다.
“야~호! 한 마리 물었네요.”
S의 낚싯줄이 휘청거렸다. 힘이 좋은 돌돔이 파닥거리며 올라왔다. 하얗고 까만 줄무늬 모양이 바다의 황태자라 불릴 만했다. 이어서 A 낚싯대가 확 꺾어지며 바다로 쑥 빨려 들어갔다. A가 당황하며 낚아채려는데 영 말을 듣지 않았다. S가 낚싯대를 함께 부여잡고 릴을 풀었다 당겼다 하며 거들었다. 대어와 두 낚시꾼의 힘겨루기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수면위로 얼굴을 내미는 녀석을 S가 뜰채로 들어 올렸다.
“행님! 행운이네요. 대물 삼치가 걸렸어요. 근 3킬로는 나가겠어요.”
바위 위에 올려진 삼치는 대물이었다.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녀석답게 엄청나게 팔딱거렸다. 낚시를 마치고 뭍으로 나갈 때쯤이면 상할 거라며 S는 바로 삼치 손질을 했다. 미리 준비해간 칼판, 회칼, 햇김, 김장김치, 겨자, 간장 통 등을 그늘진 곳에 폈다.
“행님! 오늘 낚시 조황은 시작부터 무척 좋네요. 출출한데 먼저 싱싱한 삼치 횟감부터 맛보지요. 이 삼치 한 마리면 둘이서 배불리 먹겠어요. 먹으며 이야기 나누고 다시 낚시하지요. 아이스박스에 한 통은 금세 채우겠어요.”
S가 삼치 3합 먹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여줬다. 먹음직한 삼치 덩어리 몇 개를 겨자 간장소스 통에 푹 적셨다. 그것을 넉넉한 크기의 햇김에 척 얹었다. 그 위에 김장김치를 덮었다. 조심스레 김으로 싸서 허기진 입에 쑥 집어넣었다. 볼이 올챙이 배처럼 볼록했다. 두 눈을 감고 어기적어기적 씹었다. A도 똑같이 따라서 삼치 3합을 맛보았다. 손이 연거푸 갔다.
“야~아~ 죽여주네. 쫀득쫀득하니 찰진 맛이 입에 착 달라붙네. 세상에 이보다 더한 맛이 어디 있나?”
“행님 그렇지요? 이 순간은 대통령도 부럽지 않아요. 늘그막에 이런 맛으로도 살지요.”
“S 고맙네. 수십 년 못 만나서, 식사도 제대로 못 한 걸, 기가 막히게 좋은 삼치 3합으로 퉁치는구먼.”
“하하하~ 그려요. 양이 문제인가요? 질이 중요하지요. 농축된 이 삼치회의 맛! 좋은 분과 함께 하니 입에서 술술 녹네요.”
‘그리스도인 조르바’가 따로 없었다. 내 발 디딘 곳에서 현재의 자유를 느끼며, 직면하는 일에 몰입하는 이가 바로 조르바 아닌가? 둘은 게눈 감추듯 삼치 횟감을 들었다. 세월을 먹고 추억을 되씹었다. 낚시터 해면 위로 갈매기들도 활개를 쳤다.
“행님~ 가족들도 다 무고하지요? 특히나 자녀들은 오랫동안 외국 유학한 셈이니 더 나은 여건을 갖췄겠어요. 저는 아들딸 둘인데요. 이제 겨우 앞가림했어요. 아들은 전문대 소방과 나와서 근 일 년간 취직을 못 해 고생했지요. 작년에 겨우 턱걸이로 소방공무원이 됐어요. 안산에서 근무해요. 딸은 간호 전문대 졸업했고요. 1년간 병원일 하다가 올해부터 운 좋게 해남 보건소에서 일해요. 저는 십 년 전, 회사 합병 당시 명퇴하고 고향 추자도로 내려왔어요.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해요.”
“아우님은 자녀들 다 잘 건사했네. 수고했구먼.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전문직 아닌가? 그럼 됐지. 내게도 아들과 딸이 있는데, 이 녀석들도 전문직 일 잡았어. 아들은 건축사 일을, 딸은 검안사 일을 해. 둘 다 그 일이 적성이 맞대. 아쉽게도 이 녀석들은 둘 다 호주 시드니에 있지. 나중에 뉴질랜드로 돌아 올 거래. 믿어봐야지. 손주들을 옆에서 보는 낙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내와 난 오랫동안 저가상품, 달러 샵을 운영했어. 요즘은 쇼핑몰에서 하루 8시간씩 주 5일 일해. 이번에 휴가를 내서 함께 왔지.”
“행님, 자식 농사 잘하셨네요. 애들 결혼은 했는가요?”
“응, 둘 다했어. 손녀, 손자도 보았어. 손주들 한번 보려면 비싼 값 치러야 해. 비행기를 타야 해. 하하”
A는 살아생전 이렇게 맛있는 회를 배불리 실컷 먹어보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낚아 올린 싱싱한 대어, 삼치였으니 여러모로 감회가 깊었다. 작년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병상에 계신 아버님을 뵈러 고국에 방문 왔다가 연결된 만남이었다.
“S~ 요즘은 그런 생각이 부쩍 들어.”
“뭔 생각이요?”
“응. 뭐든 문득 생각이 나면 그때는 바로 그 일에 접해보는 것. 그동안 생각이 많았지만, 여건이 안돼 머릿속에 있던 것. 어느 날 우연히 생각나고 궁금해질 때가 있잖아. 이번 자네를 만난 것도 그 경우지. 옛날부터 자네를 남달리 생각했나 봐. 회사 생활하며 자네가 내게 준 인상이 참 신선하고 맑았어. 뉴질랜드 가서도 잊히지 않더구먼. 이번 고국에 왔다가 서울에서 우연히 K를 만났어. 자네와 친히 잘 지내던 그 K. 자네 소식을 물었더니 연락처를 알려주더구먼. 순천에 계신 부모님 만나 뵙는 일 우선하고. 바로 자네와 연락하고 여기로 온 거지.”
“행님! 맞아요. 저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해요. 누가 만나서 밥 먹자고 하면 열 일을 제 박사하고 바로 만나요. 예전에는 제일이 바빠 다음에 하자고 미뤘지요. 결국 못 만나 더라고요. 저한테 온 인연의 손짓인데 요사이는 그 마음을 고이 받기로 했어요. 요즘이야 그런 만남에는 이해관계가 없잖아요. 그저 생각나서 밥 한번 먹자고 한 거잖아요. 저도 남에게도 똑같이 그래요. 누가 언뜻 생각나면 밥 한번 먹자고 연락하고 바로 약속 장소와 시간 잡아요. 밥 한 끼가 다가 아니잖아요. 오늘처럼 농축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제 하고 싶은 말도 털어놓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인데, 요즘 안식년(安息年)이라는 말도 부쩍 가슴 깊이 다가오데. 꼭 일년을 푹 쉰다는 말보다 생각날 때, 내 마음 편하게 머무르고 싶은 곳에 있는 것. 쉬고 싶을 때 쉬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떠나고 싶을 때 휙 떠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선뜻 하는 것. 나를 위한 안식의 시간이지. 단 하루라도. 시간의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지. 오늘처럼 시간의 깊이가 중요하지. 이런 다 게 안식(安息)이라고 느껴져. 오늘 자네와 만난 것도 그런 면에서 보면 안식(安息)인 셈이지. 그동안 일에 매여 자유롭게 내 시간을 갖지 못한 걸, 어느 때라도 문득 떠오르는 게 있으면 접해보는 일. 그게 현대판 안식일의 진수(珍秀) 아니겠어?”
***
A와 S는 삼치회로 배를 그득 채웠다. 세상이 다 배불리 보였다. 풍성한 마음에 힘이 실려 본격적인 낚시질에 푹 빠졌다. 세상이 둘을 도왔다. 낚싯줄을 던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고기들이 척척 물었다. 정말이지 금세 아이스박스가 가득 찼다. 돌돔, 볼락, 감성돔, 참돔, 벵에돔, 삼치… . 순리에 거스르지 않고 풍광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대자연이 주는 선물이었다. 바다에서 또 한 번 인생을 배웠다. 자리를 일어설 무렵, 추자도의 저녁노을이 바다를 붉게 삼키고 있었다. 태초의 신비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자연의 신성한 기운이 가슴에 가득 찼다. 진정한 안식년의 하이라이트를 접하고 있었다. A와 S의 인생 가을도 추자도 석양빛처럼 서서히 물들어갔다.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가 자연과 함께 깊게 채색되어갔다. *
LYNN : 소설가. 오클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