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기다리는 마음
오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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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4 11:18
두툼한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한다. 하늘의 허파가 용트림을 하며 짧고 강한 바람을 쏟아낸다. 번갈아 쉬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당장이라도 엄청난 비를 퍼부어 댈 것 같다. 비의 숨 냄새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비가 오면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힘이 솟아난다. 드물게 몸과 마음이 활력으로 탱탱해진다. 오늘은 비의 예감만으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달릴 채비를 한다. 막힘없이 달려 보기에는 고속도로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가까운 인터체인지로 차를 올린다. 목적지는 없다. 비를 맞으며 실컷 달리다 그만 달리고 싶을 때 돌아오면 된다.
‘비 탄다’는 말이 있다. 맑은 날과 비교해 비 오는 날의 심리상태가 유난히 다른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는 ‘습기에 특별히 민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흘려 넘겨 버리는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쉽게 상처를 입는다. 꿈속에서도 줄곧 비가 내리고 찬란한 햇빛 아래서는 현기증을 느낀다.
빗줄기가 사다리처럼 하늘까지 이어진 날, 그런 날은 모든 것에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쨍한 햇살 아래서 악착같아지던 마음과는 대조적이다. 닿을 듯 가까워진 하늘이 강퍅하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팍팍한 마음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일 때가 더 평화와 가깝지 않겠나.
자동차는 거침없이 달린다. 드디어 전면 창으로 빗방울이 투덕거린다. 아스팔트가 거뭇하니 젖어온다. 내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 안의 빗방울들은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에 이끌린다. 오랜 그리움 뒤 연인과의 해후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고 가슴 전체가 따뜻해져 온다.
대기를 장악한 빗방울들의 드라마가 풍성하다. 와∼와 쏠리듯 다가와 파열하듯 장렬하게 부서져 내린다. 녹음을 머금은 진초록 유리창 위로 방울방울 사념들이 매달린다. 온몸을 에워싸는 빗방울이 혈관에 주입되는 링거액처럼 메마른 정신을 빠르게 타고 돈다.
맑은 날보다는 어둑시그레 비 오는 날이 더 좋은 것은,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정서 가운데 하나이다. 두 날의 심리적 대비가 너무 도드라져, 한때는 런던이나 파리나 뮌헨 같은 곳에서 살고 싶기도 하였다. 늘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자주 가랑비가 오락가락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럽의 그 도시들을 동경해 보기도 하였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가로수의 춤은 더 격렬해진다. 서서히 타이어에 들러붙는 아스팔트의 질감도 달라진다. 차체와 도로가 한 덩어리로 밀착되며 어느덧 속도감마저 사라진다. 점차 우주적 진공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질구레한 잡념들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마침내 나는 느낌표 하나로 존재한다.
아름다운 음악과 감동적인 영화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만큼 비 또한 그렇다. 훌륭한 영화가 마음을 한껏 드높여 주듯 비도 정신과 영혼을 한 단계 상승시켜 준다.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 그 이전과 달라진 자신을 느끼지 않는가. 그때의 고양된 느낌은 욕망으로 얼룩진 우리 존재를 정화시켜 준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빗줄기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노라면, 와이퍼가 지나간 유리창처럼 말간 마음이 된다. 유난히 ‘비를 탄다’는 것은 남다르게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정화에의 요구가 유달리 강하기에 마음을 씻어 낼 수 있는 비 오는 날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마음의 정화 욕구가 남다르다. 그것은 그만큼 상처받기 쉬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상처의 파편들이 누구보다도 많기에, 그것들을 걸러 내는 작용이 더 자주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 홀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문득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환해져 온다. 동그란 핸들에 목숨을 얹고 어둑한 하늘을 향해 질주하노라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순하게 정리되면서 많은 것들로부터 초탈한 심정이 된다.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약하고 가뭇없는 존재들인지 뼛속 깊이 느껴지기도 한다. 풀과 같이 약한 생명이기에 지금, 살아서, 힘차게 내 심장에 대해 그만 숙연해지고 만다.
거대한 덤프트럭이 물세례를 퍼부으며 바짝 다가와 비켜 지나간다. 움찔하며 핸들을 다잡는다. 그렇다. 비 오는 날의 고속도로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확실한 긍정을 확인시켜 주는 공간이다. 시속 백 킬로미터의 속도감으로 펼쳐지는 비에 젖은 도로는 보다 더 본질적으로 살아갈 힘을 재생시켜 준다. 생명만이 진실이기에 누추한 욕심들이 떨어져 나가고, 검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향해 애틋한 마음이 된다. 비를 뚫고 도로를 가로질러 천천히 날아가는 흰 새를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하늘에 닿는 문장을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비를 기다린다. 햇빛 화창한 날에도 무슨 부적처럼 우산을 챙겨 들고 간절히 비를 기다린다. 비는 보이지 않는 실존적 물음에 마음껏 탐닉할 수 있게 해 준다. 삶이 무엇인지, 답 없는 답을 찾기 위해 영화관을 찾고 도서관을 드나들며 온몸에 비의 지문을 찍으며 거리를 헤매기도 한다. 예리한 비의 지문은 머릿속에 부식된 붉은 녹들을 벗겨 내고, 가슴속의 두터운 지방질을 뚫어 초록빛 생명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나날의 상처와 황폐함에도 이어질 것이다. 폭력과 무관심이 도처에 횡행해도 불친절한 우리네 하루는 안이하게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 위로 오늘도 비가 내린다.
저자 손훈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