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1-2)대한국제물류 홍승필 대표
일요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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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4 15:36
일요시사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10년 이상 한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지난 호에 이어>
야심 차게 끼어든 두 차례 교육 사업 실패로 끝나
토끼띠 동갑내기 셋 모여 도원결의…키위 학습지 및 분당 학원 빛 못 봐
오클랜드 서쪽 웨스트 하버(West Harbour)에 터를 잡았다. 언덕 아래에 있는 통나무로 지어진 작고 예쁜 집이었다. 한국에서는 웬만큼 잘 사는 집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벽난로가 있었으며, 집 앞 아름드리나무에는 각종 새가 온종일 춤을 추고 있었다. 새 소리에 깨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맞춰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길 가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만날 때마다 ‘하이’하며 이방인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 내가 사람 사는 곳에 와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한국에서 겪은 시름과 말 못할 불안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오클랜드 공기가 어느 정도 몸에 적응될 무렵, 숨을 크게 내쉬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한국을 떠날 때 가지고 온 돈은 기껏해야 5만 달러, 자동차를 사고 한두 달 렌트비 내고 이런저런 생필품을 준비하다 보니 통장 잔액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새 이민자라면 여섯 달은 적어도 놀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내 처지에 그럴 수는 없었다.
선배 추천으로 재능교육 교사 시작
대학 선배의 추천으로 재능교육 교사를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아내도 같은 계통에 종사한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 부부가 구역을 나눠 동서남북을 돌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오후 4시쯤 시작해 밤 9시쯤 끝났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렌트비와 쌀값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 처음 이민 온 사람들은 특별한 직업이 없어 대부분 놀고 있다고 했는데 다행히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심 행복한 초창기 이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 다섯 달쯤 했을까. 어느 날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동갑내기 교민이 색다른 사업을 제안했다. 현지인(키위)과 연계, 교육사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재능교육의 키위 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미 뉴질랜드에 들어와 있었던 재능교육이나 눈높이교육이 주로 한글로 된 교재를 사용하고 있었다면 새로 구상하는 사업은 완전히 영어로만 된, 그리고 키위 선생을 고용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비교적 돈 여유가 있었던 또 다른 동갑내기 교민이 주도적으로 밀고 나갔다. 막 사십 고개를 바라보고 있었던 토끼띠 남자 셋은 마치 도원결의라도 하듯 한뜻이 되어 사업을 시작했다. 뉴질랜드 한인 교육계에 새 바람을 일으켜 보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다졌다.
비즈니스 이름을 원 데이 스쿨(One Day School)로 정했다. 일주일에 한번 키위 교사가 가정집을 방문, 뉴질랜드 교과과정에 맞춰 학생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었다. 원 데이 스쿨은 뉴질랜드의 영재학교(The Gifted Education)를 본떠 구상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처음에는 관심을 많이 끌었다. 자녀들을 영재로 키우고 싶은 부모들이 하나둘 회원으로 가입했다.
뉴질랜드 교육 시장 너무 모른 게 문제
처음 몇 달간은 잘 나갔다. 뉴질랜드 스타일이 먹혀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키위 교사와 마찰 등의 이유로 하강 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비즈니스는 남에게 넘겨졌다. 도원결의를 한 토끼띠 세 남자는 자기가 먹을 풀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애당초 뉴질랜드 교육 시장을 너무 모르고 덤벼든 게 잘못이었다. 비록 내가 사장도 아니었고 또 돈을 투자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첫 사업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때마침 뉴질랜드에 광풍처럼 몰아친 바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장기사업비자(일명 ‘장사 비자’)로 들어온 교민들의 웅성거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교민 수가 늘어났다. 자연히 교민 상대 비즈니스도 활기를 띠었다. 그 물결을 타고 온 한 동갑내기 교민이 우리 집 근처에 살았다.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 또 우연히 사업을 다시 벌이게 됐다. 그 친구의 영주권을 위해서였다.
역시 배운 게 뭐라고 내가 비교적 잘할 수 있는 교육 쪽으로 사업을 정했다. 한국에서 조기 영어교육 붐을 타고 한창 불기 시작한 원어민교사 제도를 활용해 보자는 복안이었다. 원어민 교사와 일대일 과외, 돈 많은 부모를 둔 학생이 주 대상이었다. 원 데이 스쿨을 같이 했던 동갑내기 한 명과 나, 그리고 가족을 오클랜드로 보내놓고 한국에서 사업하고 있었던 또 다른 동갑내기 이렇게 셋이서 제2의 도원결의를 맺었다. 이번에는 한국 판이었다.
나는 2002년 9월, 선발대로 한국에 들어갔다. 눈물을 머금고 한국을 떠난 지 1년 3개월 만에 이루어진 귀국이었다. ‘천당 밑’이라 불리고 있던 서울 인근 분당에 호기롭게 학원을 열었다. 이름은 코위 에듀케이션(KOWI Education). 코리안과 키위를 합친 말이었다.
뉴질랜드 스타일의 선진 교육을 키위 교사를 통해 이뤄 보겠다는 뜻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매우 멋진 계획이었지만, 분당 학부모들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미국이나 영국 교육 아니 적어도 호주나 캐나다 교육 정도는 되어야 말발이 먹혀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맨발로 뛰어다니는’ 뉴질랜드 교육은 그 아래였다. 슬펐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공리 끝난 영어 캠프에 위안받아
오클랜드에서 후발대로 온 동갑내기가 키위 교사 한 명을 동반하고, 또 미국에서 공수해온 백인 원어민 교사가 합류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학생 한 명을 채울 수 없었다. 나뭇잎은 우수수 떨어지고 겨울 공기가 하루가 다르게 밀려들고 있었지만 나아질 전망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두세 달이 지날 즈음 어렵게 찾아온 학생 두 명마저 몇 번 강의도 듣지 않고 등을 돌렸다. ‘키위 원어민 교사가 가르치면 물밀 듯이 몰려들겠지’하며 순진하게 생각한 우리의 잘못이었다.
그나마 돌파구로 찾아 나선 게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난 일이 위안으로 남는다. 원어민 강사를 초청, 영어캠프를 개최한 일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를 빌려 열흘간 캠프를 가졌다. 뉴질랜드에서 온 열 명에 가까운 교사가 무한 열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생 교사 모두 만족한 영어 잔치였다. 그 행사마저 없었다면 코위 에듀케이션은 전혀 한 일 없이 허무하게 사라졌을 것이다.
캠프가 끝나자 한국에서 돈을 대던 동갑내기 친구가 담담하게 선언했다. “학원 문을 닫아야겠습니다. 전망이 없고 또 투자할 여력도 없습니다. 힘들겠지만 각자 도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셋은 허름한 선술집에서 쓴 소주잔을 들이켰다. 딱 6개월 만에 2억을 날렸다고 했다. 영어캠프로 조금 벌충을 하기는 했지만, 새 희망을 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달 월급도 받을 수 없었다. 토끼띠 동갑내기 셋은 한겨울 그 어디에도 없는 풀을 찾아 떠나야만 하는 슬픈 운명이 됐다.
다시, 기수를 오클랜드로 옮겨야만 했다.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싸나이 대장부가 어깨라도 한번 쭉 펴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 두 번째 출국한 날, 인천 영종도의 겨울바람은 한없이 매서웠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