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1-4, 최종호)대한국제물류 홍승필 대표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이민 열전(1-4, 최종호)대한국제물류 홍승필 대표

일요시사 0 2579




지난해 알바니 새 건물로 입주, 중국 물류 시장에도 진입
하버 브리지 밑에서 남모르는 눈물 삭여… ”나는 실패를 믿지 않는다” 다짐




<지난 호에 이어>
 지난해 12월 말, 나는 하버 브리지 밑을 서성거렸다. 남들은 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분위기에 취해 파티나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나는 홀로 넘실대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밤바다의 통곡 소리를 이해해야 인생을 안다는 말이 있는데, 내 꼴이 꼭 그랬다. 
 나는 하나님께 빌었다. “나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을 실망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제발 좀 도와주세요.”
 그 며칠 전, 우리 회사는 종무식을 했다. 열댓 명의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가 ‘한 말씀’할 시간이 됐다. 직원들이 긴장을 한 채 내 눈을 쳐다봤다. “연말인데 케이크 하나 못 사줘서…….” 그 뒤 내가 준비한 ‘미안하다’는 말이 차마 안 나왔다. 대신 눈물을 펑펑 흘렸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10여 년 만에 처음 흘린 눈물이었다. 명색이 그래도 사장이라는 놈이 휴가를 앞둔 직원들에게 거액의 보너스는 아니더라도 케이크 하나 정도는 돌릴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한없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직원들이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앞일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2014년 2월, 1천 평짜리 알바니 건물 사들여

 앞서 그해 2월 17일, 나는 알바니에 있는 1천 평짜리 건물을 샀다. 임대가 아닌 내 건물이다. 물론 적지 않은 은행 융자와 지인들의 돈을 융통해 쓰긴 했지만 그래도 명의는 분명히 내 이름으로 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을 초대해 개업식도 뻐근하게 했고, 넓은 책상이 있는 내 개인 공간도 갖췄다. 나는 진짜 사장, 아니 회장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계약서를 쓰기 하루 전까지도 과연 이 건물이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은행 융자를 빼고도 개인적으로 20만 달러나 빌렸지만, 마지막 날 또 몇만 달러가 부족했다. 그때 아무 조건 없이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준 분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오로지 내 꿈, 내 가능성만 믿고 투자한 분들이다.

 핸더슨에서 4년을 보내고 더 넓은 둥지를 찾아 알바니까지 왔다. 처음 시작할 때 한 달에 한두 컨테이너(20피트 기준)하던 물류 일을 알바니로 와서는 한 달에 60대~70대까지 한다. 한 해에 700대에 달하는 컨테이너가 ‘대한국제물류’라는 이름으로 오고 간다. 6톤짜리 중고 트럭 한 대로 시작한 레인보우운송 시절에 비하면 한 마디로 상전벽해이다. 10여 년 만에 내 주위의 강산이 정말로 변한 것이다.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대단한 성공처럼 느낄 수도 있다. 수많은 직원들(한인 업체치고는 좀 많은 숫자라고 할 수 있다), 번듯한 건물(1천 평이나 되는 공간을 갖고 있다), 끊임없는 일거리(쉬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외형적으로는 훌륭해 보였다. 그런데도 힘들었다. 과연 버티고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자금 순환문제 때문이었다. 하버 브리지 밑에서도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때 순간, 나는 사람들이 왜 거센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말연시에도 가족과 휴가 한 번 못 갔다. ‘내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나’하는 자기 모멸감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순간, 내가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이 떠올랐다. ‘열두 척의 배.’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선장은 파도가 거칠 때 진가가 드러난다. 훌륭한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해볼 때까지 해 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2015년 시무식 첫날부터 전화통 불나

 2015년 1월 5일, 조촐하게 시무식을 치렀다. 더 밝은 표정으로 직원들을 대했다. 속은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겉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던 것일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이 밀려들었다. 시무식 첫날부터 전화통이 불이 났다. 그 뒤 두세 달간 일에 치일 만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 경사가 하나 더 생겼다. 중국 업체에서 우리랑 손을 잡겠다고 제안을 해 온 것이다. 한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류를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다. 아직은 시작 단계라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인 운송업계를 넘어 중국 업체의 물류까지 맡게 되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갑자기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철없던 젊은 사장 시절, 두 차례 실패로 끝난 교육 사업, 비 오던 날 이삿짐 나르던 일, 그리고 사방에 돈 빌리느라 숱하게 전화를 해야 했던 일……. 아직 끝은 아니다. 가야 할 길도 멀고, 어쩌면 앞으로 이전보다 더 큰 시련이 찾아올 줄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실패를 믿지 않는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때가 언제인지 나는 모른다. 적어도 쓰리 스타(중장) 정도의 계급장을 달고 내 비즈니스 세계에서 전역식을 치르고 싶다. 어렸을 때 내 꿈은 군인, 장교였다. 세상을 맘껏 호령하고 싶었다. 남들은 하찮게 보더라도 내 세계에서만큼은 그걸 원했다.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물류 비즈니스를 하며 보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욕도 먹었고 수모도 겪었다. 다 내 불찰이었지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급하게 뛰어가다가 생긴 실수라고 생각한다. 모든 분에게 용서를 빈다. 아울러 레인보우운송과 대한국제물류(CIL)를 애용해 준 고객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성공자 7가지 특징’ 늘 지니고 다녀

 내 모발폰 메모장에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특징’이 담겨 있다. 몇 년 전 아내가 내게 준 귀한 선물이다. “꿈을 가져라. 나눠 줘라. 절제해라. 모험심을 지녀라. 부지런해라. 신뢰해라. 긍정적인 자세로 살라.” 어쩌면 내 인생 좌우명 같은 문구들이다. 나는 아직 ‘성공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저 그 ‘길’에 서 있는 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성실히 걸어갈 것을 약속한다.

 어줍잖은 글을 끝내면서 이 자리를 빌려 “선장은 키를 가지고 멀리 봐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 아버지와, 지금도 하늘나라 그 어디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실 어머니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끝>


구술: 홍승필 / 정리: 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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