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소나타

손바닥소설


 

겨울소나타

오문회 0 2072

장마가 시작되는 겨울, 6월이 되었다. 

영시, <6월이 오면>이 떠오른다

여고시절, 처음 교사로 부임하신 담임선생님께서 조회 시간마다 따라 읽게 하시던 시였다.

키가 작고 단아한 선생님께서는 우리 학생들에게 서양의 시 속에 나오는 여름 햇볕이나 덤불은 낯설기만 한데도 진력이 나도록 복창시키셨다. 

 남반구의 풍경과 뉴질랜드의 유월은 다르다. 지구별은 곳곳마다 개성이 넘치는 장식을 하고 싶어서 처처에 다른 그림을 그려 놓는다.

 비의 계절이 왔다. 어느 날은 조금 내리고, 어느 날은 많이 내리고, 어느 날은 더 많이 내린다. 날마다 파티만 즐기듯 해만 쨍쨍 뜰 수 없으려니 눅눅한 장마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

양철지붕을 건반으로 삼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처럼 두드리는 겨울비 소리도 그런대로 익숙해지고 아름답게 들린다.

바람의 속도에 따라 온종일 드럼을 내려치는 듯하다가 아이를 다독거리는 양 스스로 잦아지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남태평양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어째서 가능한지 겨울에야 알게 되었다. 옆으로 휘몰아치는 세찬 비바람이 구름을 거두어 가고 나면 하늘은 한없이 청량하다. 비바람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화려함이다. 

 남극이 연상될만한 날씨에 콩 볶는 소리처럼 지붕을 때리며 느닷없이 우박이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세상이 무너질 듯한 함성을 내며 하나라도 더 그릇에 주워 담기 바쁘다. 경이롭기만 한가보다. 우박을 하늘에서 내리는 축복 쯤으로 생각하는 동심이 신선하기만 하다. 

눈이 쉬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로운 풍경화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한국에 가봐야 할 것같다. 눈은 스키장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집 앞마당에도 학교 운동장에도 내리고 버스를 기다리는 심심할 때에도 내리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자고 일어났더니 아침에 은색의 세계에서 새로 태어난 듯 그 황홀한 정경, 이것이 마술이 아니고 무엇이랴.땅 밑에 꼭꼭 숨어 겨울방학 숙제를 하듯 자기를 지켰다가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눈동자를 보이는 새싹처럼 말이다.

 눈은 새싹을 만들기에 바쁘다.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가는 일이 동화  속에서만 일어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그럼에도 장맛비는 내게 제비가 지붕 위에 박씨를 떨어뜨리듯 그리움을 얹어 놓고 간다. 겨울의 장마를 소화해내지 못하면 파도타기의 리듬을 맞추지 못해 물살에 휩쓸려 향수병에 온몸이 젖을 것이다. 쓸쓸함을 버티지 못한 동백이 어느 새벽 무겁게 젖은 몸을 떨어뜨리듯 밤이 깊도록 한국드라마나 영화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 동네 산언덕에는 고사리나무가 많이 난다. 키는 높고 고사리나무 뿌리들은 물을 잘 빨아들인다. 고사리들이 많다는 것은 물을 흠뻑 머금고 있어서 홍수 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비교적 지대가 높아 자주 비가 내리는 편이라 백여 년 전의 댐은 오클랜드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었다.

둔덕의 고사리나무들이 빗물을 다 흡입하여 더는 저장할 수 없어서인지 골을 만들고는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기 시작한다. 도랑을 짓다가 도랑끼리 모여 강을 거치지 않고 저만큼 보이는 바다와 합류한다. 성급하기도 하다. 거기가 태평양인 줄도 모르고 물은 마냥 제 앞물만을 따라간다. 저마다 갈 길을 가는 듯 뒤따르지 못하는 마음은 종종 홍수를 이루기도 한다. 고사리나무 만큼도 믈을 움켜 쥐지 못하는 향수는 텅 빈 우주의 먼지처럼 속절없이 떠돌다가 아무 데고 홀로 풀썩 주저 앉는다. 탄환이 돌며 큰 구멍을 뚫어놓고 만 외상같다. 기억 속의 모든 상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린다. 

여덟 살의 작은딸아이는 차 안에서 천둥 번개를 보자 번개가 총알만큼 빠른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쏜 그리움은 총알보다, 빛보다 빠르게 날아갔다가 부메랑이 되어 제자리로 돌아온다. 

사람들이 댐의 물을 나눠 마시듯 겨울비는 우리의 한 철 그리움을 들이키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문을 열고 마루에 나가 본다. 비가 내리던 밤이니 별이 보일 리 없지만 습관대로 눈이 하늘로 간다 언제 소리 없이 먹구름과 바다 사이에 보름달이 떠올라와 있던 것일까?

바다는 바다, 구름은 구름, 나는 나라는 듯, 바다와 마추칠 듯 낮게 드리워진 검은 구름 사이로 홀연히 떠 있는 보름달.

먹구름 아래에서 신라의 왕관처럼 빛나는 황금색 보름달을 본 적이 있는가. 

홀로 고아하다.

저자 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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