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들,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다. 3. 느릿느릿 흐르는 흙탕물을 건너 듯

손바닥소설


 

개척자들,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다. 3. 느릿느릿 흐르는 흙탕물을 건너 듯

일요시사 0 2081

일요시사는 700호를 기념하여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실으려 한다. 


50여 년 뉴질랜드 이민 역사의 초창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먼저 살았던 사람의 삶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 마련이다. 


그 삶이 위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시대를 살아온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그 시대를 되돌아보는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들의 관심과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일과 사업

 

경력이 쌓이고 다양한 지식을 가질수록 박태양의 머리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잊힌 적이 없었다. 안정된 직장에서 편안하게 살자고 힘들게 한 공부가 아니었다. 

박태양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과의 교류였고, 거기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싶었다. 

 

경상남도 울산 태생인 아버지 박영은 일본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방학을 맞아 집에 왔다가 우연히 부산의 경남여고를 졸업한 여동생의 사진첩에서 어느 여학생을 보게 되었다.

첫눈에 마음이 끌렸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여동생에게 캐물었다.

오빠는 그 친구의 상대가 되지 않아.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데. 얼마나 예쁜 줄 알아?

통영 출신의 김순자였다.

여동생의 엉뚱한 대답이 아버지를 일어서게 했다. 당장 통영으로 달려갔다. 서로 마주보면서 아버지는 가슴이 멎는 것을 경험했다. 몇 번 퇴짜를 맞은 끝에 어렵사리 청혼을 했다. 완고한 어른들을 어렵게 설득한 끝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학도병으로 징집된 아버지는 새댁인 어머니를 남겨두고 만주로 끌려갔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편지에 창공을 날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탈출한 줄 알라는 말을 남겼다. 아버지는 동료 일곱 명과 함께 일본군에서 탈출했다.

그들은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해방 이듬해 귀국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다시 만났다. 살아 돌아오기를 바랐고, 그럴 것이라고 믿었지만 기적 같은 재회였다.

아버지는 경기도청에서 평생직업인 공무원의 첫 삶을 시작했다. 얼마 후, 부산시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임시수도인 부산시청 징집과장직을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후, 지방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외무부의 중앙공무원이 되었다.

1958년 일본대표부를 시작으로 파리대사관, 홍콩 총영사, 베트남 대사관의 참사관 및 총영사, 뉴질랜드 대리대사, LA총영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사 그리고 터키 대사를 마지막으로 오랜 외교관 생활을 마쳤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지만 업무와 관련된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던 곧고 강직한 공무원이었고,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유공자였다. 

그때, 패전을 눈앞에 둔 극악한 일본군의 감시를 목숨을 걸고 탈출할 당시를 아버지는 평생 자랑스러워했고, 함께 탈출한 일곱 명 중의 한 사람은 그때의 기막힌 이야기를 소설로 남기기도 했다.

 

1960년 대 초중반,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가난한 나라의 외교관 역시 가난했다. 처우 또한 열악했다. 당시 외교관의 통상적인 임기는 3년이었다. 파견 명령을 받은 외교관들은 살던 집과 살림을 정리해서 근무지로 떠나야 했고, 외교관의 혜택으로 구입한 면세 자동차를 되팔아서 그 차액으로 귀국 여비를 마련하곤 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각국에 파견된 외교관들에게 복귀명령이 내려졌다. 일 년 만에 갑작스럽게 귀국하게 되자 자동차를 구입했던 가격으로 처분해야 했다. 그 바람에 비행기 요금을 마련하지 못했고, 어쩔 수없이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유에서 일본의 고베까지 운행하는 여객선을 탈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운임이 가장 저렴한 뱃머리의 선실이었다. 인도양의 거친 파도가 가장 먼저 부딪치는 자리여서 충격 또한 가장 컸다. 한 달 동안 배를 집어삼킬 것 같은 파도와 극심한 멀미에 시달린 끝에 박태양의 가족은 일본의 고베에 도착했고, 비로소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박태양은 아버지가 부산시청에 근무할 당시인 1948년 부산시 서대신동 대나무숲 마을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죽은 줄 알았던 사위와 출가한 지 두 달 만에 과부가 되는 줄 알았던 귀한 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외할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셨다.

외할아버지가 직접 이름을 지어서 보내왔다.

별 태(台), 볕 양(陽). 

어둠과 밝음, 밤과 낮을 한데 묶은, 밤낮으로 노력하여 봉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부산 대신국민학교에 입학한 지 육 개월 만에 근무지가 바뀐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서울 종로구 원서동으로 이사했고, 집에서 가까운 재동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졸업을 몇 달 남겨두고 집은 서대문으로 이사했고, 박태양은 서대문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박태양은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일학년 때 아버지의 임지인 파리로 떠나게 되었음을 알리자 영어담당인 담임선생이 박태양에게 여권을 가져오게 했다. 선생님은 여러 학생들 앞에서 여권을 펴 보이며 이것이 대한민국 여권이라고. Passport라고 말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집과 살림을 정리한 후 나중에 오기로 했고, 박태양은 아버지를 따라서 프랑스로 갔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대사관에서 가까운 호텔이 묵었다. 용변을 보러 화장실로 갔다.

넓고 깨끗한 화장실에는 모양이 다른 수세식 변기 두 개가 있었다. 어린 박태양은 그중에서 나지막한 변기에 앉았다. 용변을 다 본 후 물을 내리려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손잡이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일을 저질러 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박태양과 오물이 가득 찬 변기를 내려다 본 아버지는 빙긋이 웃었고, 곧게 편 철사 옷걸이로 오물을 잘게 부수어서 하수도로 내려 보냈다. 말끔한 뒤처리였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아버지가 그렇게 크게 보일 수가 없었다. 한국사람 누구에게나 여권과 비데가 신기한 물건이던 1960년이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박태양은 배제중학교를 졸업했고, 중동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한양대학교로 진학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육군에 입대했고,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다.

 

결혼 후 박태양은 한 남자로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의 안정을 찾았다.

박태양은  Bank Head Office의 경제통계부와 국제부에서 근무했다. 3년간 은행에서의 경력을 쌓았고, 은행업무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의 경제와 해외통상과 국제교류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었다. 경력이 쌓이고 다양한 지식을 가질수록 박태양의 머리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잊힌 적이 없었다. 안정된 직장에서 편안하게 살자고 힘들게 한 공부가 아니었다. 

박태양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과의 교류였고, 거기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싶었다. 틈나는 대로 시장으로 나갔다. 새로운 눈으로 실정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값싸고 품질 좋은 물건을 가져올 수 있다면.

뉴질랜드에서 한국산 상품들이 널리 쓰이게 된다면.

당시 뉴질랜드는 보호무역 정책을 지키고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생산하는 모든 제품은 영국으로 전량 수출했던 반면,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대해서는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수입되는 품목마다 물량과 금액을 정했고, 정부의 허가를 받은 회사만이 수입 업무를 취급할 수 있었다.

엄청난 장벽이었다. 새로운 회사가 시장에 진입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 아니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기존의 품목 허가를 받은 회사에서 일정량의 수입허가권을 사들이는 방법만이 가능했다.

오클랜드에는 한국무역관이 개설되어 있었다. 박태양은 수시로 무역관과 접촉하면서 독자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한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하여 일부 품목에 대해서 소량이지만 별도의 특별한 허가를 내주고 있었다.

박태양은 주로 Hardware(기계 공구)와 Kitchen Ware(주방기구)를 취급하던 현지 무역회사를 인수했고, Rankine Trading Co. LTD를 개설했다.

젊은 박태양의 첫 사업체였다.

1980년 대 중반 무역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뉴질랜드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을 수입해 가던 영국이 EU(유럽공동체)에 가입하였고, 뉴질랜드의 모든 무역에 자유경쟁체제가 도입되었다. 수입허가권(import licence)을 따내야 하는 장벽이 없어진 대신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국산 상품을 중심으로 스테인리스 제품인 포크와 나이프, 냄비 세트, 프라이팬 그리고 장난감과 일용잡화들을 들여왔고, 도매상으로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매상에 공급했다. 박태양은 전국을 뛰어다녔다.

꿈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제품들은 값싸고 품질 좋은 물건으로 알려졌고 나날이 물량이 늘어났다. 취급하는 물량이 늘어나면 날수록, 시장이 돌아가는 형편을 알면 알수록 박태양은 속이 상했고 약이 올랐다. 

시장에 넘치는,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일본산 가전제품 때문이었다. 매장마다 일본산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들이 보란 듯이 진열되어 있었고, 가격이 싸지 않은데 별 다른 경쟁도 없이 팔려나갔다.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제품이라면 모를까, 무역을 한다는 한국인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30대 초반이었던 박태양은 한국으로 달려갔다.

가전제품으로 알려진 금성(LG의 전신)을 찾아갔다.

담당자와 마주 앉았다. 

나는 뉴질랜드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는 교민이다. 일본산 가전제품들 때문에 속이 상해서 못 살겠다. 한국산 가전제품을 뉴질랜드에서 사용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제품을 달라.

제품을 달라고 하면 줄 것이라 여겼고, 컨테이너에 싣고 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아니 마음이라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시장이 작아서일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한국에서 생산되는 텔레비전의 주파수가 뉴질랜드와 맞지 않았다. 그리고 

항 컨테이너에 실을 수 있는 여러 물량을 주문하려고 했으나, LG에서는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박태양으로서 제기된 문제여서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밀고 당기는 설득과 상담 끝에 우선 취급 가능한 제품들인 VTR, 마이크로웨이브, 언더 벤치용 소형냉장고 등을 품목 당 한 컨테이너씩 주문했다. 

한국에서 첫 컨테이너가 도착했다.

큰소리는 쳐놓았지만 과연 순조롭게 판매되어 1년 이상 최소물량주문계획을 실천해 나갈 수 있을지 속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더불어 회사에서 취급하는 품목과 품목들의 단가가 대대적으로 상승하여 자금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 문제도 여간 부담이 되지 않았다.

박태양은 우수한 세일즈맨들을 스카우트하여 시장으로 뛰어나갔다. 소매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소매상들은 말했다.

마이클, 당신의 열정은 잘 알겠다. 그렇지만 내가 한국 제품을 받아들이려면 이미 진열되어 있는 다른 회사의 제품을 치워야 한다. 나는 그 제품에서 일 년에 얼마의 이익을 얻고 있다. 당신의 제품이 그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제품이 고장이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시장에 처음 진입하려는 박태양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조건들이었고,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박태양은 모험을 택했다.

좋다, 이익을 보장하겠다, 고장 난 제품은 수리 대신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겠다.

그렇게 해서 한국산 가전제품들이 뉴질랜드의 상점들에 진열되었다. 한국산 가전제품들은 뉴질랜드 시장에서 꾸준히 팔려 나갔다. 고장이 나면 새 제품으로 교환을 해준다는 방침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현지의 매출이 늘어나자 LG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박태양은 LG의 독점공급권을 획득했다. LG에서는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 고가의 제품들까지 뉴질랜드에서 쓸 수 있는 사양에 맞추어서 공급해주었다. 첫 해에, 이백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박태양은 웰링턴에 살고 있었다.

웰링턴은 뉴질랜드의 수도이자 항구도시여서 외항선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 중에는 한국에서 온 원양어선들도 섞여 있었다. 한국에서 온 원양어선들은 대부분 남태평양의 사모아를 중심으로 하는 트롤(저인망, 그물을 끌어당기는 방식)어선이었고, 대개 현지에서 잡은 생선들을 한국으로 보내서나 외국으로 수출하는 형태의 조업을 하고 있었다. 

박태양은 오징어에 착안했다. 뉴질랜드 근해에는 오징어가 많았고, 뉴질랜드의 오징어는 한국의 그것과 맛과 모양이 가장 흡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박태양은 Park Shipping Service Ltd라는 수산회사를 설립했다.

한국에서 오징어잡이 채낚기 어선들을 불러오기로 했다. 

MAF(Ministry of Agriculture and Forestry, 농림수산식품부)의 위생 표준, 교통부가 엄격하게 규정한 선박의 안전과 20해리 영역 내 조업 등 각 부처의 허가와 수출인정서를 받아냈다.

수산업 역시 수출입 못지않은 엄청난 장벽이 있었다. 바로 Waterside Union이었다.항만 노동자로 구성된 Waterside Union은 뉴질랜드의 여러 산별 단체 중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채낚기 어선들이 잡아온 오징어를 냉동컨테이너로 옮겨서 한국으로 보내는 모든 과정에 관여하고 있었다.

섬나라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자국 근로자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독특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6시간 작업을 하고서 12시간의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항만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환경이었다.

채낚기 어선의 조업기간인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박태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밤을 낮 삼아 일했다. 연락이 오면 한밤중에도 뛰어나가야 했던 박태양은 외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값을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집어등을 밤새도록 밝혀서 작업하는 선박의 연료와 척 당 이삼십 명 선원들의 식료품과 일용품을 조달했고, 어선들의 안전을 확인했고, 선원들의 건강과 휴식에 신경을 썼고, 바다에서 잡아온 오징어를 냉장창고에 옮겨서 저장했고, 오징어를 한국으로 보내야 하는 모든 업무를 박태양은 혼자서 감당했다.

박태양은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선원들은 성실했다. 어획량은 나날이 늘어났고, 채낚기 어선은 한때 32척으로 불어났다. 한 때, Park Shipping Service Ltd에서 관리하는 한국 어선들이 뉴질랜드의 전체 오징어 총 어획고인 구천 톤 중에서 육천 톤을 달성하기도 했다. 한편, 거칠기로 유명한 웰링턴 앞바다에 비바람이라도 불게 되면 크고 작은 사고들이 떠올라 박태양은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남미 포클랜드 인근에 규모가 큰 새로운 어장이 개척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박태양은 사업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삼성그룹의 한솔제지(전주제지)와 뉴질랜드의 Pulp기업인 Winston의 합작회사가 설립되어 있었고, 한솔에서 고위임원이 파견되었다. 펄프를 생산하기 위한 원목을 안정적으로 원료를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 한솔제지에서는 뉴질랜드의 산림에 대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보여 왔다.

산림투자는 야산에 묘목을 심어서 벌채를 하기 까지는 대략 이십오 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장기적인 사업이었다. 벌채를 하기까지 이익을 창출해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십 년 후부터는 빠른 성장을 위해서 촘촘하게 심었던 나무들을 적당한 간격으로 베어내어야 했고, 두세 번에 걸쳐서 가지치기를 해야 했다. 큰 비용과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치열한 협의와 상담을 거쳐 계약에 이르는 과정을 조직적으로 관리해 나가기 위해서는 현지 실정에 밝은, 그리고 사업경험이 많으면서 영어가 능통한 사람이 필요했다.

박태양은 거기에 꼭 맞는 인물이었다. 당시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국유림(Crown Forest)의 매각을 추진하고 있었다. 박태양은 Match maker로서 기스본 북쪽의 마오리 나티포로(Ngati-porou)부족과 접촉했다. 나티포로부족은 나무를 심을 부지를 제공하고, 한솔에서 식목과 관리를 맡는, 그리고 벌채를 하면 이익을 서로 나눈다는 조건이었다. 박태양은 그동안 쌓았던 경험과 지식을 모두 쏟아 부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현지를 수십 번 다녀왔고,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갔다. 

원칙적인 합의를 한 후에도 실제적인 계약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마오리 부족의 재산은 대부분 가족 공동소유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호사들이 계약서의 동의를 받기 위해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가족을 찾아다녀야 했다. 가족 중에는 심지어 외국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넓고 느릿느릿 흐르는 흙탕물을 건너가는 것 같았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7년, 육천만 달러의 합작투자가 성사되었고, 한솔그룹과 부족회사인 NPWFL 간의 합작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05-21 14:06:31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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