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5-4) 한인 역사의 산증인 변경숙 씨
“내 공(功)의 8할은 남편 덕…자식들도 큰 힘 보탰어요”
3년 전 로이 윌슨 한국 국민포장 받아,
교민 사회 돕는 일이라면 적극 후원
“브라운스 베이에 오실 일이 있으면 전화 한 번 주세요.”
며칠 전 아침 일찍 카톡이 왔다. 별일은 아니고 사진 몇 장이 더 있으니 참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경숙의 집에 들렀다. 다섯 번째 방문이었다.
사람도 자주 만나야 정이 들듯 집도 자주 찾아가면 포근해지는가 보다. 경숙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집 안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벽 곳곳에 윌슨네 가족의 역사가 장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로이 윌슨과 변경숙의 신혼 사진, 네 자녀의 어린 시절 사진과 대학 졸업장, 경숙의 영국 여왕 훈장(QSM) 수여식 사진 등 숱한 역사의 흔적을 느꼈다.
반쯤 웃는 사진 한 장, 모든 걸 말해 주다
그중 내 시선은 한 사진에 오랫동안 멈췄다. 로이 윌슨이 부끄러운 듯 반쯤 웃고 있는 사진. 2013년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포장을 받을 무렵 찍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이 세상에서 최고로 인자해 보이는 로이 윌슨의 생애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로이 윌슨을 기억해야 한다면, 나는 그 사진 만큼 적격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바쁘실 텐데 자꾸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경숙은 차와 함께 사진첩을 내게 내밀었다. 그 사진첩에는 로이 윌슨과 가족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는 가족 사랑을 그런 식으로 내게 전했고, 마지막 원고에 조금이라도 반영해 달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로이 윌슨은 지금 많이 아프다. 경숙의 표현에 따르면 ‘머리카락만 빼고 다 아프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 잘 생긴 영국 신사가, 휠체어에 의지한 채 노년의 쓸쓸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아무리 사람 사는 게 그리하다 할지라도 가슴이 매우 아팠다.
남편은 속내 드러내지 않는 삶 살아
로이는 고독한 사람이다. 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자기가 해야만 한다고 믿는 일만 해 오고 살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숱한 한국 교민을 위해 웰링턴에서부터 마흔 해가 훌쩍 넘도록 성심껏 도운 일은 그의 박애심 때문이다.
“아빠는(경숙은 종종 남편 윌슨을 그렇게 불렀다. 나이도 실제 아버지랑 큰 차이가 나지 않고, 또 아이들 넷도 그렇게 부르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고 변명했다) 선천적으로 긍휼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참지를 못해요.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려고 해요. 어떤 우연한 계기에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주었고, 그 뒤 저를 만나고 또 한인 사회와 교류하면서 ‘미스터 알아봐달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가 된 것이지요.”
경숙의 말은 떨렸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 울림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사십 년 가깝게 한 지붕 밑에서 산 부부의 애틋한 정이 느껴졌다. 신혼 시절 문화 차이로 수없이 싸운 가슴 아픈 추억도, 고만고만한 아이 넷을 키우며 종종거렸을 한 엄마의 분주함도, 이제 인생의 겨울 끝에 서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경숙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도움과 이해가 없었다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한인회 일이든 교민 사회 일이든 제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한 마디 간섭도 안 했어요. 전폭적인 지지를 해 주었어요. 제가 교민 사회를 위해 조금이라도 세운 공이 있다면, 거기의 8할은 아빠 덕일 거예요. 세월이 흐르면서 더 진하게 느끼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 너무 싶게 흥분한다”
로이가 본 한국 사람의 단점은 무엇일까. 직접 얘기를 들을 수 없어 경숙의 입을 통해 전한다.
“아빠는 거의 감정 표현을 안 해요. 그게 어쩌면 앵글로 색슨 계통 영국 사람의 표준인 것 같아요. 그런데 간혹, 정말로 간혹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아빠가 본 한국 사람의 단점은 너무 쉽게 흥분한다는 거예요. 아빠는 인격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믿는 것 같아요. 속마음은 속에 있어야지 겉으로 드러나면 안 된다고도 하죠. 그만큼 신중하라는 뜻일 거예요.”
경숙의 남편 평은 한없이 이어졌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남편 자랑(?)을 어디에다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아빠는 에프엠(FM)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봐요. 아닌 것은 아닌 거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고 믿죠. 그 신념으로 팔십 넘게 생을 살아온 거예요. 바닷가에 있는 조개껍데기 하나도 못 가지고 오게 했고요. 주차 금지 구역에는 어떤 경우라도 차를 못 대게 했어요.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을 모르고 살아왔어요. 그만큼 철저했다는 뜻이에요. 법은 지키라고 만든 것이지 피하라고 만든 게 아니라고 주장했지요. 자연히 아이들도 아빠 말을 따르며 살고 있어요. 그 문제 때문에 수도 없이 싸웠고, 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빠가 대단하게 느껴져요. 그게 아빠의 삶이었어요.”
아주 간단한 예를 두 개만 든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 장애인 자리에 차를 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늘 행사장 멀리 차를 세웠다. 이유는 먼저 온 사람이 차를 뒤에 대야 늦게 오는 사람이 차를 앞에 대고 들어올 수 있다는 배려였다. 또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는 모든 사람이 즐기라고 조물주가 세상에 내놓은 것이지 어느 집 거실에 장식되기 위해 거친 비바람에도 뿌리를 박고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나 같은 평범한 한국 사람이 듣기에도 가슴이 찔리는 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잔잔한 외침을 글로 옮기면 열 장 백 장도 더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브라운스 베이 시니어 클럽 스무 해 가깝게 지켜
로이 윌슨이 지금 가지고 있는 공식 직함은 브라운스 베이 시니어 클럽(Browns Bay Senior Club) 회장이다. 스무 해 가깝게 이어왔다. 그는 이 일을 소리 없이 해 왔다. 그의 입과 발은 아내 경숙의 몫이지만 마음만큼은 오롯이 그의 것이다.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고귀한 뜻이기도 하다.
이제 경숙의 또 다른 분신인 네 아이의 얘기를 할 차례다. 특별히 돋움체나 글자 크기를 크게 해 강조할 수는 없지만, 글 쓰는 이의 마음을 잘 헤아려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큰아들 준호(1981년생), 둘째 아들 에릭(1982년생), 셋째 아들 데니 사랑(1984년생) 그리고 딸 코리아나(1987년생)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준호)과 뉴질랜드에서 생활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엄마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한없이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고, 엄마와 아버지의 드라마틱한 삶을 잘 이해하고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지금은 한국 여자와 결혼해 서울에서 사는 큰아들 준호가 오래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한 인터뷰에서 정체성을 질문에 ‘나는50% 영국인, 50% 한국인 그리고 100% 키위예요’라고 답했어요. 우리 아이들 넷을 설명하는 데 있어 그것만큼 더 나은 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또 아이들이 나와 아빠가 교민 사회를 해온 작은 일에 무한한 긍지를 갖고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뿐이에요.”
‘소나무는 뜻이 있어 추녀 끝에 푸르지 않는다.’
경숙의 집에는 한글로 된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서예가 김해근 씨가 써준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소나무는 뜻이 있어 추녀 끝에 푸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란히 취헌당(翠軒當)이란 글자가 있다. 신사임당처럼 한 시대에 큰 발자취를 남긴 여자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어쩌면 이 호칭이 경숙의 뉴질랜드 삶을 한 마디로 줄여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뉴질랜드 교민 역사의 산증인’으로 살아온 경숙의 솔 향기는 계속 이어질 거라고 믿는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나는 물었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경숙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아빠를 잘 보살피는 것이에요.”
대답이 너무 밋밋해 보여 재차 물었다.
“그래도 아직 꿈을 놓으실 나이는 아니신데…. 뭐라도 있지 않을까요?”
경숙은 또다시 일 초의 주저함도 없어 못을 박았다.
“아빠가 불쌍해요. 좀 더 인생을 즐기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몹시 아프네요. 기도 좀 해 주세요. 많이 아프지 말라고, 남은 삶을 잘 지켜달라고요.”
순간 나는 경숙의 가슴 속 눈물을 보았다. 남편을 향한 절절한 사부곡이었다.
한인 사회는 변경숙과 로이 윌슨 가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 없는 자식이 없듯이 그 누군가의 희생 없이 우리 교민 사회가 자리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빚진 자 중의 한 명임이 틀림없다.
나는 집 안의 훈기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거실문을 나섰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건넸다. 사진 속 로이 윌슨 씨였다. 그는 어색한 듯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작가 양반, 수고 많았소. 보잘것없는 우리 집 얘기를 쓰느라 말이오. 늘 건강히 지내시오.’<끝>
글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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