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일기]”동네 큰 시어머니”

손바닥소설


 

[농장일기]”동네 큰 시어머니”

이 정희 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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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농사만 아니면 계절이 오고 가는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바쁜 일상 속에서 그 동안 너무 많은 것 들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은 흘러 10여 년 전 성상의 40대 젊었던 내가 이곳 뉴질랜드에서 승화되는 마음이 들고 갖가지 아름다운 젊은 날 들을 반추 해보고 추억과 함께 한다. 김치를 버물리다가 문득 창 밖으로 높고 투명해진 하늘을 보며 아! 몇 일 뒤면 한국의 추석 이구나! 한국에서 울고, 웃고, 주거니 받거니, 사랑이 넘치고 요란했던 추석날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문득 그리워 진다.  우리 친정 엄마 손잡고 명절 장을 보러 동네 잠실 재래시장 골목을 누비며 사먹든 달콤한 순대 한 접시의 추억과 동네마다 있던 재래시장의 먹거리 야채들은 얼마나 많았든 가?

차례상의 엄숙했던 추억도, 추석날 귀성길에 교통사고로 전 가족을 잃은 이웃의 가슴 아픈 사연의 추억도, 친척들과 노래방에서 난장판 회포를 풀던 추억도, 돌이켜 보면 가문의 주춧돌인 큰 시아버님 어머님을 모시고 친척들 안부를 확인 하며 명절 밥 한끼 같이 먹자고 각자의 일터와 삶 속에서 모여 회한을 푸는 자리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세월이 유수 같다더니 이민 10여 년의 역사가 다망 속에서 제 것을 찾지 못하고 마치 뭔가에 떠밀리어 살아가고 있는 물리적 역학에 의한 생활이고 보니 그 속에서 그날 그날을 잊고 지나간다. 나도 어떤 삶을 살아야 큰 시어머님 같은 좋은 주춧돌이 될까? 도 생각해 본다.

순간 딩동! 벨이 울려 매장 으로 나갔다. 매장이라고 해야 김치공장 처음 지을때 화물차 차고로 쓰던 휑한 공간에 몇 년전 농장을 하고부터 시골 5일장의 난전 처럼 야채 박스 몆 개에 배추 무 담아 놓고 팔다가 그나마 걸핏 하면 끊기는 겨울 배추 때문에 문을 열다가 닫다가 지난해부터 진열장이며 냉장고 몇 대에 제법 구색이 갖춰 진듯하다 . 동네 어르신들 몇 분 이나 장을 보러 오셨다. 그 어르신 들은 근처에 50여명의 모임이 있어 매주 한 두 번씩 들러 시는데 누구 보다도 편하고 다정하며 극진히 모셔야 하는 동네 큰 시어머님들 이시다.

요것 조것 이 없다고 내게 질책해 주시며, 생활의 지혜도 가르쳐 주시는 분 들이고 농장에 때때로 배추도 같이 심어주시고 무 밭에 풀도 뽑아 주시고 집에 가지고 계신 씨앗과 모종도 갖다 주시고 웃고 우는 얘기와 집안의 대 소사를 간간이 흘러 주시는 고마우신 분들이다. 진열 해둔 추석에 쓸 무를 고르시면서 “이번 무 꼬라지는 왜 이래 !” 하신다 내 딴에는 예쁘고 잘생긴 무를 진열한다고 했었건만 “겨울 무가 다 그렇지요 밭에서 추운데 고생하며 몇 달이나 키웠는데….섭섭한 마음이 울컥해도 나는 그분들의 마음을 잘안다.

우리 엄마도 명절장 볼때도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크고 크신 윗분 들에게 자신의 정성을 최대한 하기 위해,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마음으로 읽었었다. 그렇지만 눈앞의 영달에 연연해 살아가는 지금 나의 모습이 너무나 싫어진다. 농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보고 쏘아 붙어댔다 “농사 좀 잘 짓지 무 꼬라지 하고는…. 자초 지종을 듣더니 허허 시어머니가 한국에 계서 모시지 않으니 수 십명의 동네 어르신들이 시어머니 역할을 해서 고마우시단다. 늘상 “아” 하면 “어” 하는 남편 말솜씨가 밉기 그지없다.

 

공장 뒤 텃밭에 나가 봤다. 매장에 야채 구색이 있어야 하니 농장에 각종 모종이 조금씩 남을 때 마다 텃밭에다 심었었다. 조금씩 싱싱하게 뽑는 야채는 텃밭이 최고의 맛이고 멀리 농장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까…  올겨울에 50여 그루 심어 놓은 깻잎이 비닐 속에서 진 녹색의 빛깔을 띄고 잎이 벌써 손바닥 만큼 잘 크고 있었다. 깻잎은 일조량이 부족하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밤에도 대낮처럼 불을 밝혀 줘야 하기 때문에 비바람 가릴려고 비닐을 씌우고 2층 아들방에서 전기를 연결하여 전등을 6개나 밤 낮 없이 켜줘서 기른 깻잎이다.  썸머타임이 해제되고 난 뒤 비닐과 전등선 을 벗겨 줘야겠다. 언젠가 부터 자연을 찬미 하는 것은 나이 탓 일까? 연륜이 많을수록 인간은 자연과 친해 진다고들 한다. 자연으로 돌아갈 인생이기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탄 하는 것 일까. 한국에서 살 때 시멘트 문화에 시린 현대인의 고통은 아마도 공해로부터 오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만큼은 이곳 청정지역의 뉴질랜드에 살아가는 나 와 이웃들이 부인 할 수 없는 것 같다.

 

3년 전 공장 뒤 야산의 못쓰는 땅을 내가 우겨 굵고 잔 나무 뿌리들을 일일이 뽑아 내고, 뉴질랜드 특유의 뻘흙을 파내어, 흙 과 계분을 수십 포대기 사서 넣고, 삽 과 호미로 화전민 처럼 땅을 일구어 우리는 몇 일이나 심한 몸살을 앓았었다  야산 풀밭이 훌륭한 텃밭으로 변하여 지금은 들깨 부추 상추 미나리 고추 열무 등 갖가지 잡 채소를 조금씩 심어 우리 식구들과 이웃들의 먹거리 가 퐁퐁 솟아나는 옹달샘 텃밭처럼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잔디를 깍으로 왔던 Kiwi컨트랙트가 이 작은 텃밭을 보고 WonderFULL! 이라고 엄지 손가락을 내민다. 이렇듯 할 수 있다는 우리의 생각, 인간의 두 팔과 10개의 손가락으로 현대기계가 꿈도 못 꾸는 걸작품과 신통한 미의 극치를 창조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의 위대성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언젠가 딸에게 가게를 맡겨두고 농장에 배추를 심고 돌아와 보니 난리가 난적도 있었다. 텃밭을 아는 동네 어르신분이 깻잎을 사러 와서 엄마가 계시면 텃밭에서 같이 깻잎을 땄었는데… 하시면서 그분이 혼자서라도 깻잎을 텃밭에서 직접 따서 가겠다고 우기신단다. 그러시라고 한 뒤 얼마 안되어 텃밭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막내가 내려가 보니 샌드 플라이에게 수도 없이 물려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었다 그분은 치마를 입고 오신 것이었다 매우 가려워서 징징 우는 다리를 막내가 싯겨서 약을 발라줬던 했던 추억도 있다. 이번 봄엔 이 옹달샘 텃밭에 뭘 심어야 할까? 재래시장 처럼 먹거리 채소종류를 동네 큰 시어머님들에게 여쭤 봐야겠다 그리고 나는 의지하고 사랑 하게 되었다. 그분들이 이곳 뉴질랜드에서 한국교민 가문의 주춧돌인 큰 시아버님 과 큰 시어머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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