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dise duck을 찾아서..

손바닥소설


 

paradise duck을 찾아서..

박호길 0 1486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에게 왜 여기로 이민을 왔느냐고 물어본다면, 각자 나름대로의 몇 가지씩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든지, 완벽하게 안전한 안보여건 때문이라든지, 혹은 복지제도를 포함한 각종 선진국형 사회 시스템이 좋아서 라든지 등등 하지만 가장 으뜸가는 이유는, 공해 없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을까 싶다.

나 자신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즐기다가 이곳 뉴질랜드의 자연환경이 너무 좋아서 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몇 차례 이사를 다니다가 약 구년전 이 곳 GurfHabour 지역으로 옮겨왔는데, 이유는 뉴질랜드에서도 경치가 특히 아름답고, 각종 야생 동식물들이 정겹게 조화를 이루고 살고 있는가 하면, 그들과 사람들이 같이 즐거움을 공유하며 지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바로 앞에는 산책로를 따라 제법 길고 폭이 넓은 연못이 있는데,이 연못에는 이름모를 각종 조류들이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며 살고 있다.그래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이들을 보며 즐거워 하고,때로는 어린애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빵 조각을 던져 주며 행복해 하기도 하는데, 그럴때면 여러 종류의 조류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서로 빵 조각을 줏어 먹겠다고 이리뛰고 저리뛰는 모습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때때로 어미 조류들이 새끼들을 일렬종대로 세우고 물 위를 유유히 헤엄쳐 다니기도 하는데,정말 지상낙원이 이런 곳인가 보다하고 동네사람들에게 혼자 감탄 할 떄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 조류 중에는 동네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조류가 한쌍 있었다.영어로는 Paradise Duck 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인데,나도 사실 이 동네에 이사를 오기 전 까지만 해도 별로 관심이 없던 오리였다.우리 말로 굳이 번역을 하자면 '낙원 오리'라 해야 할 것 같다.제법 큰 영한 사전을 몇 권 뒤져봐도 그 이름이 없는 오리 종인데,암컷은 머리 부분이 희고 수컷은 머리 부분이 검은 색에 가까운 진한 곤색을 하고 있고,크기는 일반 오리와 비슷해 보인다.

특이한 것은 평상시에 거의 유일하게 이 종 만이 암수가 한쌍을 이루고 사록,알을 부화시켜서 새끼들을 기를 때에도 마찬가지 암수가 같이 이를 담당한다. 다른 종 들은 암컷이 홀로 새끼들을 양육하는 것에 비하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이 Paradise Duck한 쌍이 매년10월이면 이 곳 연못 근처에서 알을 낳고 부화시켜 다 자라면 분가를 한 뒤 자취를 감추곤했다.

그리고 다시 10월이 되면 그들은 다시 이곳 연못에 찾아와서 또 그렇게 하곤 했는데,내가 이사를 온 첫해에는 5마리의 새끼들을 기로고 있었다.암컷이 앞장을 서고,그 뒤를 새끼들이 뒤 따라가고,그리고 맨 뒤에는 항상 수컷이 사주경계를 하며 따라다니다가 낙오하는 새끼들을 보살피는가 하면 또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다른 조류들이 어슬렁 거리고 있으면 가차없이 선제 공격을 하여 쫓아버리곤 했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기 위해 산책을 나오면, 그 오리 가족부터 어디에 있나 두리번 거리며 찾아보기 일쑤였다.그 다음해 10월에는 3마리, 3년째에는 8마리의 새끼들을 부화시켜서 연못 주변뿐 아니라 동네 전체를 아름답게 장식 해 주었다.동네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이들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일상이 되다시피 했고, 이웃끼리 서로 즐거운 단소를 나누며 구경하기도 했다. 그들은 단연 우리 동네의 귀염둥이들이었다. 그런데 4년째 되던 해 10월에는 새끼를 10마리나 부화해서 데리고 다니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나는 너무 보기 좋아 매일 산책을 나갈 때 마다한 참이나 넋을 잃고 이 그림 같은 모습을 감상 하며 행복해 했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과연 이들 암수가 10마리의 새끼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잘 키워 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이었다. 수컷은 정말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사주 경계하랴,낙오하는 새끼들 거두랴,근접해 오는 다른 조류들을 쫓으랴,정신이 없을 지경이였따.암수는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도로가까이 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먹을 걸 달라고 졸졸 따라 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차를 운전하는 운전자들은 이들이 행여 다칠까 봐 속도를 줄이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동네 안쪽에는 젊은 청년 등이 몇 명 있었는데, 이들은 인정사정 없이 차를 빨리 몰고 다니곤 하여 나는 늘 마음이 무거웠다. 그 해에는 마찬가지로 12월이 되자 새끼 10마리를 데리고 도로 가에 나온 어미와 아비오리는 지나가는 산책객들을 보고 빵 달라고 조르곤 했는데, 지나가는 자동차들에 의해 이들이 다칠까 봐 나는 당연히 마음이 조마조마 하곤 했다.

그러든 어느 날 새벽일 찍 아침산책을 나와 무심코 연못가를 걷고 이 썼는데, 산책로 옆의 도로상에 오리인지 갈매기 인지는 몰라고 조류 한 마리가 차에 치어 죽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얼른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봤더니, 분명 새끼10마리들을 위해 항상 보살피던 그 수컷이 분명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고 온 몸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연못가를 따라 그들 가족들을 찾아보았다. 그들은 연못 건너편 언덕 풀밭에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토록 열심히 가족을 지키든 수컷은 보이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그들은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연못 건너편 안전한 곳으로 피해있었던 것이다,그날 이후 나는 밥맛도 잃고,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책임감 강했던 그 수컷이 너무도 불쌍하고 가여웠다.그러면서도 나는 매일 여러 번씩 먹이를 갖다 주며 그 남은 식구들을 더 극진히 보살피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수컷이 없어진 상황에서 암컷 혼자 과연 새끼 10마리를 잘 길러 낼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수컷이 살아 있을 대에는 암컷과 새끼들은 안심하고 숲 속이나 물에서 먹이 활동을 했는데, 수컷이 없어지자 암컷이 대신 먹지도 않고 새끼들이 먹이 활동을 할 때에 망을 보며 새끼들을 챙기기도 있었다. 그들 가족에게 먹이를 줄 때에 특히 암컷에게 집중적으로 많이 먹였다.

혼신을 다 한 암컷의 보살핌으로 그들 새끼들은 모두 건강하게 잘 자랐다.그러는 동안 시간이 지나 다음해 2월초가 되어 새끼들이 모두 성장하자 예년과 같이 그 가족들은 자취를 감췄다. 나는 다가오는 10월에 암컷이 다른 수컷과 짝을 지어 다시 찾아와 주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곤 다시 10월이 왔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나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매일 연못 주변을 살펴보곤 했으나 11월이 되고 12월이 지나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탈했지만, 그 다음해에는 꼭 짝을 지어 다시 찾아오길 기대하곤 했으나, 3년째 기다려도 나는 그들은 다시 볼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혹시 짝을 잃은 암컷이 마음의 상처 때문에 어찌 잘 못 된 거 아닌가 하고 방정맞은 생각도 해본다. 금년10월에는 꼭 그 불쌍한 암컷이 마음에 드는 수컷을 다시 만나서, 예전처럼 이 곳 연못가에서 새끼들을 데리고 다니는 정겨운 모습을 보여주길 기원해 본다. 아주 간곡히……

 

 


박호길 1942.5.9

021 076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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