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들 놈의 10년 럭비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6> 둘째 아들 놈의 10년 럭비

오문회 0 2212
아침 일곱 시, 아직 어둠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창밖을 내다보니 늦은 밤에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여태도 그치지 않고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뉴질랜드는 이제 겨울로 접어든 것이다. 한철 내내 쉬임없이 비가 내린다. 차라리 눈이라도 되어 떨어지면 좋으련만,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으니 을씨년스럽게 늘 비에 젖어 지내야 한다.

오늘은 토요일. 둘째 아들 예솔이의 럭비 결승전이 있는 날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바깥을 내다본 이유는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쉽지 않겠군. 이 진흙탕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드넓은 운동장에는 학교를 대표하는 럭비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뛸 준비를 하고 있다. 넉 달간의 치열한 리그전 끝에 결승에 오른 두 팀이 우승컵을 앞에 두고 최종 승부를 펼쳐야 하는 순간이다.

예솔이가 럭비를 시작한 것은 2005년이었다. 만 열 살에 무작정 동네 럭비 클럽에 가입시켰다. 두세 살 때부터 운동 감각이 있어, 주위에서 운동선수로 키워보라고 한 놈이었다. 럭비공, 농구공, 축구공 등 그 어느 공이든 손과 발에만 갖다 주면 서커스의 묘기가 되곤 했다. 워낙 볼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 내가 보기에도 운동으로 ‘한 자리’ 할 녀석이었다.

초등학교 2년, 인터(Intermediate)2년간을 클럽에서 뛰었다. 늘 학교 대표로 나갔고, 지역 대표로도 뽑혀 우승컵을 거머쥐기도 했다. 키 크고 덩치 좋은 현지 아이들을 제치고 최우수 선수상도 수차례 받았으며, 코치로부터 “재능 있는 아이니까 잘 키워보라”는 말도 들었다. 더군다나 아시안(한국인)이 럭비를 하는 경우가 드문 탓에, 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었다. 아버지 된 마음에 짐짓 어깨가 으쓱했다.

정확히 열 시 삼십 분, 심판이 드디어 경기 시작 호각을 분다. 전후반 60분간의 혈투가 시작됐다. 예솔이가 뛰고 있는 팀은 76킬로그램 미만 팀, 거친 운동으로 다져진 선수들의 몸은 웬만한 어른 체격을 넘어설 정도로 우락부락하다. 보호 장비 없이 지구 상에서 펼쳐지는 스포츠 중 가장 격렬하다는 럭비는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겁이 난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겨우 붙잡고 있던 우산이 뒤집힐 정도로 바람마저 드세다. 하지만 럭비가 어떤 스포츠인가? 그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게 바로 럭비다. 어른들은 물론 초등학교 어린 꼬마 선수들까지도 날씨를 핑계로 경기가 취소되는 경우는 없다.

경기 시작과 함께 말 그대로 이전투구가 펼쳐진다. 한 팀은 볼을 뺏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고, 또 다른 팀은 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도망을 간다. 열 다섯 명으로 구성된 양 팀의 선수들은 상대 팀의 트라이 라인을 향해 열심히들 달리고 또 달려간다.

전반전은 0대 3. 상대팀의 페널티 킥이 성공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후반 30분, 시간이 지나면서 응원전도 점점 뜨거워진다. 홈 구장의 이점을 충분히 살린 상대팀은 응원단의 기세마저 등등해 큰 소리로 자기 팀에 힘을 실어 준다.

10분간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후반전이 시작된다.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후반 20분쯤 드디어 예솔이네 팀의 트라이. 5대 3, 경기는 역전됐다. 옆에 앉았던 우리 팀 응원단들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준다. 영문을 몰라하는 내게 ‘네 아들이 트라이를 했어’하고 알려준다. 스무 명에 가까운 선수들이 트라이라인을 앞에 놓고 서로 얽히면서 혼전을 치르고 있는 통에 결정적인 트라이 순간을 놓친 것이었다.

경기 종료 5분 전. 아쉽게도 상대 팀에게 페널티 킥을 허용하고야 만다. 상황이 재역전됐다. 5대 6. 우승컵이, 오던 길을 멈추어 변신한 애인처럼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남은 몇 분 사력을 다해 뛰어보지만, 추가 점수를 얻는 데 실패하고 넉 달 장정 끝에 다다른 결승전은 그렇게 아쉽게 지고 말았다.

어깨가 축 처진 상태로 다른 선수들과 함께 빗속을 걸어 시상대로 오는 예솔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안쓰러움보다 대견함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잘했다, 예솔아. 최선을 다했으니 됐다. 고생했다.’ 그렇게 속으로 아쉬움을 토해냈다.

간단한 시상식이 끝난 후 온 식구가 맥도날드에 들렀다. 예솔이 위로연 자리였다. 그때까지도 섭섭한 기운이 남아있었던지 예솔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일부러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온 식구가 이런저런 위로의 말을 했지만 예솔이에게는 별 소용이 없는 듯했다. 점심을 먹는 내내 우울한 기색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어쩌면 이번이 자신의 10년 럭비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시간이었는데, 최후 승리 문턱에서 실패하고 말았으니 실망이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은 있지만, 몸집이 따라주지 않아 프로 선수로 진출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을 것이다. 엄마 아빠의 유전자 탓으로 큰 덩치를 물려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그동안 둘째 아들놈 럭비 뒷바라지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겨울 한 철, 약 넉 달 동안 토요일 아침마다 열리는 럭비를 지켜보며 어쩌면 우리네 인생이 럭비와 같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공이지만 그 공을 꽉 움켜잡고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가야 하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햇수로 9년, 게임 수로만 따져도 100게임이 훨씬 넘는 것 같다. 게임을 준비하기 위해 훈련한 시간까지 합치면 수학이나 영어 등 다른 정규 과목 못지않은 시간을 썼다.

대부분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지만, 더러는 패배의 쓰라림도 맛보았다. 전후반 60분 동안 쉴 새 없이 트라이 라인을 향해 열심히 뛰고 또 뛰었지만 한번의 트라이도 못한 적이 많았다. 상대 팀 선수와 격렬하게 몸싸움을 하다가 수차례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때로는 패스 실수와 순간의 판단 착오로 궁지에 몰린 적도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예솔이는 럭비를 통해 어쩌면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를 인생의 수많은 절체절명의 순간을 미리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럭비 경기의 꽃은 트라이(Try)이다. 인생 역시 그 어떤 식이든 성공점(Try)을 향해 가는 여정이다. 트라이를 하기 위해서는 부딪치고 넘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눈비가 오고 짙은 안개가 껴도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럭비가 그렇듯이 인생도 그렇다. 예솔이가 럭비를 통해 그 점을 배웠다면 비록 프로선수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학창시절은 잘 보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먼 훗날 예솔이가 “럭비는 내 인생의 선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나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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