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의 초대, 낯선 곳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21> 여행에의 초대, 낯선 곳

오문회 0 2002
 
보들레르의 시(詩) ‘여행에의 초대’를 읽은 것은 대학교 1학년 늦가을이었다.
 
내 사랑 내 누이여(Mon enfant, ma soeur),
거기 가서 같이 사는(Songe a la douceur)
감미로움 꿈꾸어 보렴(D’aller la-bas vivre ensemble)
한가로이 사랑하고(Aimer a loisir),
사랑하다 죽어가고(Aimer et mour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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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선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La, tout n’est qu’ordre et beaute),
호화로움, 고요함 그리고 쾌락뿐(Luxe, calme et-volupte.)
(‘여행에의 초대’ 첫 부분: 기존의 번역을 참조하되 맘에 안 드는 부분은 고침)
 
그때 나는 막 불어 공부를 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때였다. 왜 그랬는지 우리 때엔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남학생들은 대개 독일어를 했고 여학생들은 불어를 했었다. 나도 독일어를 했고 그걸로 대학교 시험을 보았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계속 독일어를 했으면 독일어라도 제대로 했을 터인데 문학을 하려면 최소한 3개 국어는 해야 된다고 혼자 마음을 정하고 독학으로 불어 공부를 시작했었는데 덕분에 지금은 독일어도 불어도 다 제대로 못한다.
 
여하튼 그때 1967년 가을에 나는 사전을 찾으면서 어렵게 불시(佛詩)들을 읽곤 했었는데 구르몽의 ‘낙엽’, 아폴리네르의‘미라보 다리’, 베르렌느의 ‘거리에 비가 내리듯’ 같이 비교적 평이한 시들을 말도 안 되는 발음으로(독학했기 때문에 발음이 내 맘대로이다) 외워보면서 혼자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시가 보들레르의 ‘여행에의 초대’인데 나는 이 시가 그냥 무조건 좋았다. 내용도 좋았고 또 불어 특유의 부드러운 발음으로 시작되는 ‘모낭팡 마 쇠외르, 송쥐 아 라 두쇠외르’의 그 억양이 너무도 좋아서 그 다음 내용들은 그냥 꿈꾸는 듯이 머리 속으로 가슴 속으로 들어와 박혔다.
 
60년대 말 그 어렵고 배고프던 시절에 가난한 대학생에게 여행이란 꿈과 같은 것이었다. 해외 여행이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고 용기 있는 몇몇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학생증 하나 가슴에 품고 지방으로 무전여행을 다녀와서 어떻게 밥을 얻어 먹고 다녔는지 기차를 어떻게 표 없이 탈 수 있었는지 무용담을 늘어놓으면 모두가 부러운 눈초리로 입을 벌리고 듣던 때였었다.
 
서울에서 자라난 내가 서울을 처음으로 벗어나 여행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던 때는 대학에 들어가 처음 맞는 과여행(科旅行) 때였다. 그 지긋지긋하던 시꺼먼 교복을 벗고 무겁던 교모도 벗고 자라기 시작하는 머리를 왼 쪽으로 빗어 넘길까 오른 쪽으로 빗어 넘길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선 대학 생활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던 대학교 1학년 처음 맞는 5월 달이었다. 과(科) 사무실에 큼지막하게 벽보가 붙었는데 5월 마지막 주에 가게 될 과여행에 관한 안내문이었다. 행선지가 설악산으로 정해졌다는 것, 기간은 3박4일이라는 것, 그 동안 모든 강의는 휴강이라는 것, 희망자에 한해서 가지만 특히 신입생들의 많은 참가를 바란다는 것, 그리고 경비는 일인당 2,000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여행이라니, 그리고 말로만 듣던 설악산이라니, 그것도 여학생들과 같이 선생님도 없이 우리끼리만 가는 여행이라니. 하지만 문제는 경비였다. 2,000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 때 우리 학교 한 학기 등록금이 12,800원이었으니까 비록 다른 사립대학교들의 등록금에 비하면 훨씬 쌌다 하더라도 이에 비추어보면 여행 경비 2,000원이 꽤나 큰 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어렵게 입을 떼어보았지만 ‘아직 1학년이니 담에 가자’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다였다.
 
그 때 우린 왜 다 가난했었는지, 게다가 우리 학교에 다니던 남학생들은 왜 여학생들에 비해 더 가난했었던지 지금도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그 때 우리 과에 모두 20명이 정원이었는데 그 중 남학생이 12명이었고 여학생이 8명이었다. 남학생 집안은 다 가난했었는데 그 중 2명만이 그런대로 여유가 있는 것 같이 보였고 반면에 여학생들은 다 웬만해 보였다.
 
여행 신청 마감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고 우리 신입생들 중에서는 남학생 2명과 여학생 4명이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오후 강의가 비어있는 시간에 우리 몇몇이 학교 앞 다방으로 차를 마시러 갔는데 마침 여행을 가기로 한 여학생 4명이 함께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여학생 하나가 조심스럽게 내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우리끼리 이야기를 한 건 데요,’하면서 그녀는 내 눈치를 살폈다. 이야기를 꺼낸 그녀는 우리 과 8명 여학생 중에서 내가 제일 맘에 들어 했던 여학생이었다. 아니 내 맘에만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부만 잘하면 뭐하냐, 그래도 여자는 예뻐야 하지 않니?’라고 남학생들끼리 모여 쑥덕거릴 때에 항상 제각기 맘에 두고 얘기하는 여학생이 바로 그녀였다. 나는 동그란 그녀의 두 눈을 직시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처음 가는 과여행인데 과대표가 안 가면 좀 이상하잖아요?’ 하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때 과대표였다. 입학 후 첫 과모임에서 자기 소개를 하고 과대표를 뽑았는데 아마 내 이름이 제일 기억하기 쉬웠었는지 이상하게 무더기 표를 받아 과대표가 되었다.

‘그래 저희들 부모님께 말씀 드렸더니 과대표가 같이 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돈을 마련해 주셨어요. 우리 넷이 똑같이 준비한 것이니까 같이 가세요. 부탁 드려요. 그리고 돈은 담에 여유 되면 갚으시고요,”라고 그녀는 힘들여 한꺼번에 말하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를 내미는 그녀의 손은 봉투보다 하얬고 분명 떨리고 있었다. 나는 멍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그녀의 흰 손과 빨간 얼굴만 교대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하세요. 우리 모두 다 과대표가 같이 가길 원해요,”라고 다른 세 여학생이 이번엔 입을 모았다. 그 때 난 아까 강의가 끝났을 때 왜 이들 4명이 내게 차를 마시러 가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가난하다는 것만 빼놓으면 참 좋았던 시절로 생각된다. 남학생 여학생이 서로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하고 이름 뒤에 씨(氏)자를 붙여 높여 부르고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 과여행을 가는 딸들에게 그래도 과대표가 있어야 맘이 놓인다고 경비를 모아주는 그 부모님들의 마음 씀씀이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슴 한 귀퉁이를 따뜻하게 만든다.
 
어떻게 그 자리가 끝났는지 모른다. 나는 계속 그 여학생의 빨개진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나 혼자만 남아있었고 탁자 위엔 흰 봉투가 있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나는 여행을 간다고 말씀 드렸고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부모님에게 과대표의 경비는 과에서 내준다고 얼버무렸다.
 
그렇게 해서 그 초여름 나는 생전 처음 여행이란 것을 해보았고 첫 여행에 갔었던 설악산은 너무 좋았고 같이 간 여학생들과의 3박4일은 황홀하기만 했고 언젠가 여유만 되면 다시 가겠다고 벼르고 벼르다가 두 번째로 다시 설악산을 간 것은 신혼 여행 때였다. 남들이 다 가는 제주도를 제쳐놓고 설악산으로 갔다. 그 때 같이 간 신부는 대학시절의 여학생은 아니었고 지금의 내 사랑하는 아내이다.
 
그 뒤로 여행은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나는 틈만 나면 여행을 갔다. 결혼 전에는 혼자서, 결혼 후에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여유만 생기면 아니 일부러 여유를 만들어서 사방을 돌아다녔다. 한국에서도 이곳 뉴질랜드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어떤 여행을 하던지 항시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은 대학교 1학년 때 설악산을 갔던 첫 ‘과여행’이고 그 가을 처음 만나 읽은 뒤 가슴에 들어와 떠나지 않는 보들레르의 시 ‘여행에의 초대’이다.
 
그 때, 60년대 말, 가난한 대학교 1학년생에게는 프랑스는 꿈의 나라였는데 그 꿈의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었던 보들레르는 또 어떤 나라를 꿈꾸고 있었기에 ‘여행에의 초대’를 통해 노래하면서
 
‘------
거기선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La, tout n’est qu’ordre et beaute),
호화로움, 고요함 그리고 쾌락뿐(Luxe, calme et-volupte.)’이라고 속삭였을까?
 
우리들의 삶 자체가 여행일 것이다. 삶이라는 여행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여행을 꿈꾸고 또 여행을 가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낯선 곳을 향한 막연한 동경과 그 곳에 가면 잠시라도 벗어버릴 수 있는 현재의 삶의 답답함 때문이 아닐까?
 
햇볕이 너무 투명해 가슴이 시려오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80년대 초였을 것이다. 그 날 오후 차를 몰고 아내와 더불어 서울을 벗어났다. 어디든지 가고 싶었고 목적지는 없었다. 어느 사이에 한가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고 우린 돌연 이것 저것에 감탄하였다. 언제 코스모스가 이렇게 피어났느냐고 호들갑을 떨면서 차를 세웠고 다시 가다가 흔들거리는 갈대를 만나면 그 속에 들어가서 같이 흔들거렸다. 그러다가 괜찮아 보이는 작은 음식점에 들어가 빈대떡과 메밀묵을 맛있게 먹었다. 참 맛있었는데 나도 아내도 거기가 어디였었는지 지금도 기억을 못한다.
 
음식점을 나왔을 때 해가 떨어지고 있었고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길을 더듬듯이 천천히 길을 찾아
차를 몰면서 우린 집으로 돌아왔다. 짧은 한나절의 나들이였지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좋은 시간을 보냈었다. ‘오늘 너무 좋았어요. 여자들은 집만 벗어나도 좋을 때가 있어요,’라고 말하며 내 손을 꼭 잡는 아내의 얼굴이 저녁 해보다 환했다. 그 때 나는 다시 보들레르의 ‘여행에의 초대’를 떠올렸고 언젠가는 여행을 주제로 하는 시를 한 편 써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낯선 곳’이라는 시어(詩語)가 가슴에 들어왔고 난 또 여행과 보들레르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 삼십 대 중반에 썼던 시라 치기가 사방에 흐른다.
 
 
낯선 곳
 
낯선 곳에 이르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
아름다운 곳이 아니어도
이름난 곳이 아니어도
낯선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곳은 편안한 곳이 된다
 
아는 곳이 없기에 곳곳이 새롭고
아는 이가 없기에 모두가 반가운
그곳은
내가 그에게
그가 나에게
낯선 이가 되어주는 곳이다
 
일상의 옷을 훌훌 벗을 수 있는 곳
그곳에선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모처럼
얼굴을 활짝 들고 모자까지 벗어버린
나는
즐겨 익명의 나그네가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는 곳
주면 받고 내키면 주면서
미소가 오가는 곳
그곳에선
서로가 서로에게 풍경이 된다
 
내가 만난 그가 나를 스쳐간 풍경이듯
나도 그를 스쳐간 풍경이고 싶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햇볕이 나면 그림자 드리우며
벗은 몸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그곳에서 그와 나는
스쳐간 풍경일 따름이다
 
내 삶의 구석구석에
낯선 곳을 만들어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쳇바퀴같이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사방에서 조여오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훌쩍 뛰어들어 어슬렁거릴 수 있는
나만의 낯선 곳
그곳에서 기지개 맘껏 켜고
어릴 적 옛 꿈을 다시 꾸고 싶다.
 
1983년 어느 가을날, 석운 씀
 
 
석운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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