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은 방긋 웃는다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23> 미란은 방긋 웃는다

오문회 0 2136
잠결에 문득 깨어보니 남편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

“어, 당신, 왔어요?”

이즈음 남편이 한밤중에 그녀를 깨우는 일은 흔하지 않아서 미란은 그냥 도로 잘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고 싶었다. 이즈음 밤에 자주 깨는 그녀로서는 지금 일어난다면 다시 잠들기 힘들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뒤척이다 보면 그냥 새벽이 오고, 집을 나서면 하루 종일을 신선한 야채인 것처럼 쌩쌩거려야 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잠을 자 둬야 될 텐데……

하지만, 하지만 밤늦도록 일하고 들어온 그를 생각하니 그럴 수는 없다 싶었다. 게다가 남편이 그녀 방 스탠드를 켜놓고 문까지 열고 나갔기에 일어나라는 강한 표시라고 생각해야 했다. 아래층 부엌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를 보며 미란은 억지로 잠에서 덜 깬 눈을 명랑하게 보이려 표정을 만들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누구에게나 방긋거리는 자신을 돌이켜보자 정작 가족에게 그러지 않는 스스로가 우습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어땠어요?”

자리를 잡고 늦은 저녁을 들기 시작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을 할 때면 미란은 항상 살짝 긴장했다.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두려운 적이 많아 ‘이 세상에 더 겁낼 것은 없어’라고 늘 자신에게 세뇌한 다짐을 무의식중에 상기하곤 했다.

“오늘, 정말 힘들었어. 악마에게 씌운 것 같아.”

그가 어떤 악마를 상대하고 왔는지 그래도 침착하게 얘기하는 동안 미란은 그 악마가 그녀 자신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적당히 남의 일처럼 들으려 애썼다. 울고 웃고 흥분하는 것은 이즈음 그녀 자신만의 일로도 벅차도록 많았고, 악마까진 아니지만 수많은 독사와 매일 싸우는 삶이 그녀에게 주어진 요즘의 일상사였다. 겨우 세 식구인 그녀 집안에서 그들은 돌아가며 서로 냉정을 유지해야 했다.

오늘 밤 정신 온전한 사람의 역할은 그녀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얘기를 듣는 동안 어쩔 수 없이 그 악마는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오늘 처음 시작한 손님이 직업여성으로 보이는 여자라고 했다. 30대 후반의 미국 스타일의 영어를 쓰는 그 여자는 산더미만한 가방 3개를 트렁크에 실으라고 했다. 생각보다 가방이 쉽게 들어져 “어, 가방이 가볍다”고 말하자 내 가방 무겁다고 길길이 악을 썼으며, 20달러밖에 안 나오는 짧은 거리를 가며 계속 창문을 닫아라, 에어컨을 켜라, 왜 이 길로 가느냐 등등 별별 짜증을 다 냈다.

기가 막힌 남편이 “에이 참”하고 한숨을 짓자 니네 나라말을 썼다며 회사에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후 22달러 나온 요금을 20달러만 던져주고 가 버렸다. 택시 운전을 하다 보면 좋은 사람도 만나게 마련이지만 오늘 밤처럼 질 나쁜 손님을 만나는 날도 많았다.

“오늘 교회에 갔어야 하는 건데…… 내일도 모레도 쉬는 날이라, 오늘이라도 좀 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간 건데……”

이 대목에서 미란은 김구 선생님의 어머니처럼 강해야 했다. 아니면 한석봉 어머니든지. 때때로 아내는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남편의 소심한 신앙이 그렇게 믿기 시작한다면 하느님은 정말 기대기 힘든 분이 될 터였다.

미란만 해도 평범한 한 인간으로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용서를 해 왔던가. 그런데 매주 가던 구역예배를 안 갔다고 바로 그 악마를 배치해서 내 보내시다니…… 그럼 그 악마는 그런데 쓰라고 태어났단 말인가?

남편 얘기를 들어주는 동안 적당히 남편 대신 욕을 해주며 결국 불쌍한 것은 그녀에게 무시당하고 힘들었던 그가 아니라 그렇게 험하게 살 수밖에 없는 그 여자라고, 그러니 오히려 동정하고 잘되도록 빌어 주자고 마무리를 지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들은 자애명상이란 좋은 강연이 생각나서 다행이었다. 화가 나면 오히려 그 대상을 위해 복을 빌어주라는 명상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미운 사람을 위해 그럴 수는 없으니 나 자신을 위한 복을 빌고, 그다음으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다음으로는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사람,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미운 사람을 위해 빌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저절로 마음이 누그러진다고 했다.

물론 남편이 귀담아듣지는 않을 터였다. 단지 그의 아내가 지금 그의 곁에 있고 종알종알 거리니 조금은 풀리는 기분일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가 분신처럼 끼고 다니는 갤럭시 뎁데이트에서 한국의 대리운전 24시간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밤 10시쯤 시작해서 밤을 꼬박 새우고, 하룻밤에 몇십 킬로를 걷게 된다는 그들 이야기를 보며 마음이 여린 그는 자기 일처럼 마음 아파했다.

“정말 남자들은 참 힘들겠다. 처자식이 뭔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끝내 둘이 같이 울먹였다.

“하지만 진짜 멋지다. 진짜 남자쟎아.”

그리고 당신 역시 너무 훌륭하다고, 당신 일생 중 가장 멋지다고 진심으로 말했다. 나보다 힘든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힘든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보며 치유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몰랐다.
 
남편의 한 때,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준비해 놓고 작은 솥에 쌀을 씻어놓고 오래오래 기다렸던 그때, 아파트 복도에 서서 집으로 향해 가는 차들의 행렬을 막막히 바라보던 그때, 그때가 더 행복했을까. 일요일마다 고기며 상추며 싣고 달려가던 양수리, 그들만 가던 조그만 숲 속 평상에서 잠시 누리던 황금 같던 낮잠…… 목에 침을 쏘곤 콜라와 함께 순사한 가엾은 벌의 추억…… 그때가 더 행복했을까.

지금도 괜찮다고 미란은 가만히 미소짓는다. 온전히 내 것인 저 남자. 그토록 기다리게 하던 저 남자가 이제 나를 기다리기도 하니,오래 기다려왔던 인생이여. 기다림은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미란은 다시 또 방긋 웃는다.


오미란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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