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이라 불리운 아가씨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29> '황금'이라 불리운 아가씨

오문회 0 2140

내게도 그런 꿈같은 때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모처럼 해본다. 지금은 '추억'이라고 말하지만, 그때는 '꿈'이었다. 양희은의 노래 제목마냥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대학 2학년, 1983년 봄으로 기억된다. 우리 집에 새댁네가 이사를 왔다. 아니, 우리 집은 아니었고 대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다세대 주택 방 한 칸을 새댁네가 차지했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몇몇 가구가 한 지붕 밑에서 살곤 했다. 전형적인 도시 빈민들의 한 모습이었다.

새댁네는 충북 진천 시골에서 올라왔다. '서울특별시민'이 되기 위해 부모 형제를 떠나온 것이다. 남편은 버스 운전을 했고, 새댁은 집안 살림만 하고 잇었다.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순박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새댁은 서른 살이 조금 안되어 보였다. 젖먹이 계집아이가 하나 잇었다. 그 젖먹이를 우리 어머니가 종종 포대기로 둘러업고 마실을 나갔던 생각이 난다.

어느 날, 새댁이 장독대에서 고추장을 푸다가 날 조심스럽게 불렀다.
"학생, 애인 있어?"
난 깜짝 놀랐다. 뜬금 없이 애인은 왜?
"없는데요"
"다음 주에 시골에서 내 조카가 오는데......, 소개해줄까? 정말 예쁜데."
새댁은 풋 읏음을 내게 지었다. 나는 지금도 그 웃음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 얼굴보면 너도 놀랄껄.' 하는 표정이 숨어있었다.

그 다음 주, 새댁의 조카 아가씨가 올라왔다. 처음 본 순간, 그녀는 한 마디로 '예술'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실물로 본 얼굴로는 최고였다. 요즘 배우로 말하면, 김현주를 똑 닮았다. 한국 배우 가운데 가장 섹시한 입술을 지녔다는 김현주가 삼십 년 전 서울 중랑구 면목동 다세대주택에 강림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난 구름 위를 한없이 떠다녔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꿈 같은 나날을 보냈다. 소설 속 사랑 얘기가 내 얘기 같았다. 유행가 속 가사가 나를 위해 쓰인 것 같았다.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그녀의 뒤태만 슬금슬금 엿보던 내가 어느날, 마음을 다잡고 데이트를 청했다.
"우리 영화 한 편 보러 갈래요?"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마당을 왔다 갔다 하던 그녀가 예상치 못한 내 수작에 흠칫 놀랐다.
"영화요? 음~~ 한 번 생각해 볼게요."
그리고는 아기 엉덩이를 추어올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가씨는 그 뒤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이 흔적을 감췄다. 새댁 말로는 부천에 있는 중소기업에 취직되어 갔다고 했다. 사장 비서실이 진천 아가씨의 일터였다.

새댁을 통해 어렵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수십 차례 전화했지만 들려준 답은 너무 바빠서,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갑자기 회식이 생겨서..... 그런 뻔한 핑계였다.

내 나이 스물하나, 피 끓는 청춘의 짝사랑은 거칠 게 없었다. 몇십 차례 완곡한 거절에 오히려 용기를 냈다. 면목동에서 버스를 타고 청량리까지, 일호선 지하철을 타고 부천까지, 그리고 마을버스를 타고 직장까지 쳐들어갔다. 싸나이 답게 멋있게 돌진하면 그 정성에 감동해 큐피드의 화살을 받아줄 줄 알았다.

저녁 일곱 시쯤 회사에 도착했다. 직원들이 삼삼오오 퇴근하고 있었다. 몇십 분 기다린 끝에 그녀 모습이 드디어 내 눈에 들어왔다. 벌컥 손을 잡아채고 갈 수 잇는 만용이 없어, "차나 한잔 하자"고 정중히 요청했다.

동네 다방에 들어갔다. 흔들거리는 육십 촉 전구가 그녀를 비췄다. 선녀였다.
"왜 내 데이트 신청을 안 받아 주는 거죠?"
선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학생은 너무 어려요. 학생 짝은 지금 고등학교나 중학교에 있을 거에요. 난 연하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는 1962년생이었고 나는 1963년생, 고작 한 살 차이였다. 연하 남자는 관심이 없다는 게 그녀의 답이었다. 삼십 분이 넘게 감언이설로 설득했지만, 그녀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나마 얘기 내내 웃음으로 대해 준 걸로 봐서는 연하 남자라는 거절의 이유가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뒤 다방 문을 나섰다. 그녀는 손을 한 두어 번 흔들고 내 곁을 떠났다. 아무 미련이 없는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봄바람을 따라 저 세계로 갔다.

나는 마을버스를 타고 부천역으로, 다시 일호선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으로, 그리고 또다시 버스를 타고 면목동으로 돌아왔다. 집 앞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병을 깟다. 안주는 내 짝사랑의 입술이었다.

이문열은 '젊은 날의 초상'에서 짝사랑의 괴로움을 말해주지 않았다. 한수산의 대중소설도, 황석영의 무협(?)소설도, 이청준의 순수소설도 다 짝사랑은 황홀하다고만 알려줬다. 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거짓말쟁이 이야기꾼들이 꾸며낸 신기루일 뿐이었다.

이쯤에서 내 짝사랑의 이름을 밝혀야 할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은 황금순. 그녀가 오래전 내게 한 농담 중, "거꾸로 읽으면 순황금이에요. 호호~~"하던 생각이 난다. 그녀가 날 버린 뒤, 나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 특히 24K 순황금은 더 그렇다.

이선희가 부릅니다.
'아, 옛날이여~~'


시인과 나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오클랜드문학회는 시, 소설, 수필 등 순수 문학을 사랑하는 동호인 모임으로 회원간의 글쓰기 나눔과 격려를 통해 문학적 역량을 높이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문의>021.272.4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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