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을 한철, 그리고 항아리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31> 그 가을 한철, 그리고 항아리

오문회 0 1934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싫던 때가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안간다. 그렇지만 그 가을 한 철 동안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도무지 반갑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만나도 그 만남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앗다. 누구를 만나든 만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이미 마은은 딴 데 가있었고 어떻게든 빨리 헤어질 궁리만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 일쑤였다. 만나면 주고 받아야 하는 일상의 대화가 너무도 지루했고 자꾸만 굳어지려는 내 얼굴 표정을 애써 관리해야만 하는 스스로가 짜증스러웠다. 기껏 큰 마음먹고 약속을 정해 사람들을 만난 뒤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뒤 내 시선은 이미 딴 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마음 속에선 벌써, '시간 낭비야 이 시간에 음악을 한 곡 더 듣던지 아니면 책을 한 권 더 보는 게 낫지'라고 중얼거리고 잇었다.

만나는 상대가 누구든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흔히들 이야기하는 대인기피증이 내게 왔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과의 만남이 기대했던 것 만큼 내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그런 경우가 너무 자주 생기다 보니 차츰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어졌던 것 같다. 그 결과로 어느덧 나는 나만의 작은 성(城)을 쌓아가고 있었고 아무에게도 그 성의 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고 나 자신도 그 성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자연 생활이 단조로워지고 일상의 반경은 회사와 집 사이로 좁혀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사무실 창으로 늦가을 햇살이 아른거리며 넘나들었고 그때 '왜 요새는 친구분들고 안만나세요?'하고 그날 아침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조심스레 묻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불현듯 전화기를 들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당신 집에 잇을 거지. 나 오늘 좀 일찍 들어갈게'라고 말하고 나는 회사를 나왔다. 서초동 사무실에서 청계산 자락에 있는 신원동의 집까지는 차로 십여 분 밖에 안걸리는 거리였고 급할 것이 없는 그 가을 오후의 이른 귀가 길은 왠지 마음이 가벼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낯익은 거리 풍경이 새삼 정겨웠다.

'어서 오세요. 피곤하신가 봐요?' 대문을 열어주며 묻는 아내에게 괜찮다 라고 말하며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정원 한구석에 놓인 벤치 위에 주저앉았다. 늦가을 오휴의 하늘은 온통 푸르름이었고 늦은 오후 햇살이 마당 구석구석을 밝혀주고 잇었다. '여기 참 좋네. 당신도 좀 앉아요.'라고 내가 말하자 금새 표정이 밝아진 아내가 '차 끓여 갖고 나올 게요'하고 팔랑 날듯이 가벼운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벤치 안으로 좀더 몸을 밀어넣으며 편하게 앉았다. 마당 한 구석에 있는 감나무 잎사귀들이 이미 다 홍빛으로 물들었고 잔디는 노랗게 퇴색하고 잇었다. '벌써 가을이 깊었구나'라고 혼자 중얼거리는데 벤치 앞 탁자 위에 놓여있는 항아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못 보던 거네'라고 나는 차를 갖고 나온 아내에게 물었다. '아 오늘 아침에 샀어요. 항아리 장사가 골목을 돌아다니길래 나가봤다가 하나 샀어요. 예쁘죠?'라고 묻는 아내에게 나는 건성으로 그렇다고 답하면서도 유심히 항아리를 보았다.

늦가을 정원에서 참 오랜만에 아내와 더불어 차를 마시며 이것저것 노래하듯 이야기 주머니를 풀어 놓는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인 그 오후는 그 가을 한철 굳게 쌓아가던 내 작은 성(城)도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내 아내가 사다놓은 그 작은 항아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은 몸뚱어리에 뻥 뚫린 둥근 입 속으로는 푸른 가을 하늘이 쏟아져 들어가는 것 같았고 가끔씩 산들거리는 가을 바람도, 그리고 너울거리며 서성이는 저녁 햇살마저도 그냥 지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반갑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사람들과의 만남이 반갑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내 자신의 마음자세에 있었다는 ㄴ것을 나는 그 오후 작은 항아리로부터 배웠다. 그 저녁 자기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항아리

너의 모습이 어떤 것이던지
너의 색깔이 어떤 것이던지
내 너를 사랑함은

항시
하늘을 향해 몸의 일부를 열어 놓은
너의 자세에 있다.

동그스름한 너의 몸
안으로 안으로
깊은 설움과 고뇌를 내려 쌓고
모으다 모으다
동그라미가 된 두 손으로 몸을 열고
곡선의 몸가짐 가장 겸손한 앉음새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너의 자세

항아리여

항시
열려있는 축복의 몸짓이여



석운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오클랜드문학회는 시, 소설, 수필 등 순수 문학을 사랑하는 동호인 모임으로 회원간의 글쓰기 나눔과 격려를 통해 문학적 역량을 높이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문의>021.272.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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