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시를 생각한 날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38>문득 시를 생각한 날

오문회 0 2038

책을 읽다 보면 글이 쓰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산책을 하다가 혹은 지루하게 뻗은 길을 운전하다가 불현듯 글이 쓰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느닷없는 발상이 예전에도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멈추지 않았고,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젯밤은 비바람이 심해 집안에서 바람 소리만 들어도 쓸쓸한 날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잠을 잘 자지 못했습니다. 피곤한 아침이었지만, 비가 그쳤다는 이유만으로, 그래도 따뜻한 기운 덕에 기분 좋다는 이유만으로 산책을 하고 싶었습니다. 물통을 들고 휴대폰을 챙기고, 모자 달린 점퍼를 입고 길을 나섰습니다. 고만고만한 정원과 담장을 가진 집들이 쭈욱 늘어선 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 중 37호 집 앞을 지날 땐 발걸음을 더 늦추었습니다. 유난히 잔디가 가지런하고, 길거리와 잔디밭이 연결되는 경계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지나는 이의 마음까지 홀가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크지 않은 화단에는 잘 손질된 장미 나무가 여름을 기다리고 있고, 붉고 흰 키 작은 꽃들이 검은 흙밭에서 제 몫의 색과 향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을 한 번도 마주친 적은 없지만, 아마도 잡초를 고르고 시든 꽃잎을 솎아내며 하루를 시작하는 나이 지긋한 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 길로 십 여 분을 더 걸어 작은 연못에 도착했고, 오리 한 마리가 흙탕물에서 졸고 있는 것을 한참 구경했습니다. 그의 주황색 발은 구정물 속에서도 선명한 색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문득 시를 생각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배워야만 했던, 외워야만 했던 시 말고 진정 내가 원해서, 존재 대 존대로 시가 나에게 온 때는 언제였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저에게 그런 존재의 시란 것이 성큼 성큼도 아니고 살금 살금도 아닌, 이미 스윽 하고 들어와 앉아 있음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저의 무시무시한 외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찮은 대접에도 서운해 하지 않고 언젠가 돌아볼 저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고마웠습니다. 토라지지 않고 포기하고 가버리지 않은 기다림이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어딘가에 꽂혀 있는 <기형도 전집>을 찾았습니다. 늘 우리 집에 있어서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책입니다. 게다가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책입니다. 철저히 존재의 무존재함을 혼자 감내한 책입니다. 저는 그 탄탄한 양장본 시집을 주로 육개장 사발면의 얇은 뚜껑을 덮는 용도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3분을 기다리면서 한두 편 읽어보기도 했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한 일입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어쨋든 오늘 저는 기형도의 시 중에서 <밤눈>을 읽었습니다.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온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띁에 첫발을 디디고 죽은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기형도이 시들은 모두 신문 같습니다. 신문처럼 줄줄이 문장을 이루고 있는데 그 안에는 리듬도 있고, 이미지도 있고 언어의 절제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형도를 '소설적 시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시에서 네 속을 열면 몇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엉킨 은실들이 울고 있다고 하고,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다고도 합니다. 앞문장의 주어는 눈이고, 뒷문장의 주어는 썩은 가지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모든 시구의 주어가 다 '나'로 다가옵니다. 아무도 나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았던 사납던 밤, 내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어 휘이휘이 갈곳, 쉴 곳 없이 떠돌아다닌다고 말합니다. 바로 내 속을 열면, 어딘가 그런 구석이 반드시 있음을 알아서 그런건지 오늘 따라 이 시가 정말 성큼성큼 가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문득 그런 날이 있겠지요. 왠지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앚아 뭘 해도 흥이 나지 않는 그런 날이 잇겠지요. 그나마 다행은 매일매일 해야 할 일과가 있다는 것뿐. 다행히 그 일련의 단계를 생각 없이 따라가다 보면 하루가 지나고 내일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뿐인 날 말입니다.

그런날,
저는 시를 읽고,
그런 날,
시는 수줍어하지 않고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옵니다.
그래서 하루가 또 금방 갑니다.


간서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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