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짝 셋

손바닥소설


 

등짝 셋

일요시사 0 1953

 날씨가 무덥다 보니 집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윗도리를 훌러덩 벗게 된다. 나만 그러면 더위에 지친 중년 남자의 일탈로 생각하겠는데, 아들놈 셋도 천연덕스럽게 따라하다 보니 딱히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좁은 거실에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쓰리 플러스 원 플러스 원 플러스 천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 해 걸터앉은 사내 넷은 반라 상태이다. 책 읽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스마트 폰으로 게임하고……. 다들 저마다의 신비한 세계에 빠져있다. 대충 찍으면 외설 사진이 될 것이고, 정성 들여 찍으면 예술 사진이 될 듯싶다.

 

 등짝 하나.

 

 올해 스무 살 된 둘째 놈 등짝이다. 다른 놈은 ‘등’으로 묘사해도 되지만, 이 놈 등만큼은 ‘등짝’으로 써줘야 사실감이 난다. 꼬마 때부터 럭비와 농구를 해서 그런지 이놈 등짝과 어깨는 유난히 넓고 쫙 벌어져 있다. 전체 몸의 삼 분의 이가 등에 몰려 있지 않나 싶다. 정말로 내 아들이 아니라면, 시원하게 등짝을 한 번 갈겨 주고 싶다. 그럴만한 이유는, 물론 없다. 그냥 한 대 갈기면 홍해가 갈라지는 쫘~자작 소리가 날 것 같고, 오래전 날 버리고 간 그녀가 화들짝 놀라 다시 돌아올 것 같기도 하다.

 

 등짝 둘.

 

 막내 놈 등짝이다. 이놈은 태어날 때 무려 4.3kg의 위용을 자랑했다. 그때 백일잔치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돌쯤 되었을 때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될 것 같은 품새를 뽐냈으며, 정작 초등학교 입학 나이인 다섯 살 때에는 ‘충성’하고 거수경례를 할 정도로 숙성해 있었다. 얼굴도 새까맣고, 다리도 새까맣고, 등짝도 당연히 새까맣다.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 하는 목욕재계 탓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유전자가 흑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등짝 셋.

 

 한번 앉았다 하면 꼼짝하기 싫어하는 큰놈은 등짝이 얼굴만큼이나 잘 생겼다. 축구로 단련된 몸이라 그런지 앞뒤에 꼭 필요한 살만 붙어 있다. 에이 쓰리(A3) 갈색 종이를 한 장 펼쳐 놓은 듯 어디 하나 구김살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여자들이 딱 좋아할 등짝이다. 그런데 등짝 위에 있는 어깨가 늘 휘어져 있어 문제다. 무엇에 집중할 때 어깨를 너무 써서 그렇다.

 

 아들놈 셋의 등()을 처음으로 함께 본 것은 십여 년 전이다. 애들 방학을 맞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가족과 함께 로토루아 여행을 갔다. 막내 놈이 두 살 무렵이었으니 둘째 놈은 다섯 살, 큰놈은 일곱 살 정도 되었을 때였다. 모텔에 있던 큰 욕조에 애들 셋을 풀어놓았다. 고만고만한 풋고추를 달랑달랑 흔들며 신 나게 놀았다. 그때 내 눈에 유독 한 장면이 클로즈업됐다. 서로 등을 밀어주던 장면이었다. 때를 벗겨주겠다는 뜻은 아니었고 그냥 거품 내서 놀다가 그런 장면이 나온 것이다.

 

 그 순간을, 나는 기록으로 남겼다. 사진에 담았다. ‘욕조 속의 형제애’(Brotherhood at the Bathtub). 한 컷 한 컷 찍을 때마다 세 놈 다 활짝 웃었다. ‘좌향좌’ 하면 셋 다 몸을 돌렸고, ‘뒤로 돌아’하면 여섯 짝 엉덩이가 함께 물거품을 내며 180도 방향을 바꿨다. 같은 피를 받고 태어난 박 씨 집안의 등() 세 개가 버팀목처럼 보였다.

 

 둘째 놈이 여섯 살 때였다. 피해갈 수 없는 홍역(수두였을지도 모른다)에 걸렸다. 예방주사를 맞았는데도 이놈은 유독 상태가 안 좋았다. 두 세 살 때부터 운동감각이 있어 공을 몸에 달고 살았지만, 엄살도 현란한 드리블만큼이나 상상을 초월했다. 홍역으로 죽는 게 아니라, 엄살로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액션으로 보여줬다.

 

이때 든든한 힘이 되어준 게 바로 형과 동생의 등짝이었다. 둘째 놈의 아픔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다른 놈들이 가짜 환자 행세를 해 줬다. 전우애, 아니 형제애를 몸으로 실천했다. 등짝에 하얀 약을 덕지덕지 바르고 곡()을 같이 했다. 그러면 곡이 악()으로 바뀌었다. 아들놈 셋은 서로 등짝을 바라보며 웃고 또 웃다가 아침 해를 맞았다.

 

 그 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이 내 키 보다 커졌지만 그 놈들의 등짝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내 등의 짐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이민살이 이십 년, 지나간 삶을 돌아보면 내 등짝에 있었던 것은 그 어떤 부담이었다. 희망과 불안 사이, 내 꿈과 의무 사이, 그리고 덧없이 맞게 된 중년의 나날들.

 

등이 내 뒤에 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앞에 있었다면 그 많은 짐을 어떻게 졌을까,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무거운지 몰랐으니 질 수 있었고, 얼마나 더 가야 내려놓을 수 있는지 몰라 지고 갔을 뿐이다. 아직은 그 짐을 다 내려놓을 수는 없다. 어쩌면 평생 내려놓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내 등짝의 운명일 것이다.

 

 요즘 들어 불쑥불쑥, 아들놈 셋의 등짝이 정겹게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이 나온다. 믿음직스럽고 대견하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형제애는 돈 몇 푼이나 몇 마디 위로로 채워지는 게 아닐 것이다. 말로 안 해도 등짝 같은 든든함이 알게 모르게 느껴질 때, 바로 피를 나눈 진한 형제애가 빛나지 않을까 믿어진다.

 

 이 무더운 여름밤, 지구 상 셋밖에 없는 내 아들 놈들의 등짝이 하나로 보인다. 벌거벗은 등짝 하나로 말이다.


                                                                                                   오클랜드문학회 회원_시인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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