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역사이야기] 지폐 인물로 알아보는 뉴질랜드 역사 이야기 마지막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역사이야기] 지폐 인물로 알아보는 뉴질랜드 역사 이야기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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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를 빛낸 과학자

 

지폐 인물로 알아보는 뉴질랜드 역사 이야기 마지막으로 100 달러 지폐 인물 어니스트 러더퍼드를 이번호에서 알아본다. 러더퍼드는 뉴질랜드인 최초로 노벨상을 1908년에 수상했다. 지폐 마지막 인물이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라 이번호에서는 러더퍼드에 이어 뉴질랜드를 빛낸 과학자를 알아보기로 한다.

러더퍼드에 이어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다음과 같다.


Maurice Wilkins
1916년 뉴질랜드 태생으로 1962년에 생리의학 분야의 노벨상을 획득했고, Alan MacDiarmid 1927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과학자로 200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알바니에
William Pickering Dr
가 있는데 William Pickering도 유명한 우주 과학자이다. 우주경쟁이 시작되던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 Sputnik를 처음으로 궤도에 올려놓자 깜짝 놀란 미국은 뒤질세라 4개월 후 곧 Explorer 1호를 발사하여 궤도에 진입시켰다. 이를 성공시키도록 주동역할을 한 과학자가 William Pickering이다.




100
달러 - 최초 외국 유학생, 노벨 화학상 수상자 Rutherford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871 8 30일 뉴질랜드 넬슨의 스프링 그로브에서 7 5녀 가정의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러더퍼드의 아버지 제임스 러더퍼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4살이 되던 1842년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뉴질랜드로 이주했다.

어네스트 러더포드는 각종 장학금을 휩쓸면서 중등학교(College), 대학 학사(BA), 석사(MA) 과정을 마쳤다. 칼리지 때 최우수졸업생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어 세계 박람회 기념 장학금을 받아 영국 캠브리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0여 년 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러더퍼드는 뉴질랜드인 최초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원소 붕괴 및 방사성 물질의 화학에 관한 연구’(Disintegration of elements and the chemistry of radioactive matters)로 상을 받았다.

어네스트 러더포드가핵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방사선 물질의 붕괴와 변환라듐으로부터 나오는 입자들원자구조에 관한 이론인위적 원소 붕괴 등에 관해 탁월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이다.

1919년 어네스트 러더포드는 캠브리지대학 케빈디쉬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다. 그 후부터 그는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중수소의 예언, 디락의 양전자 이론의 발전, 제임스 차드윅의 중성자 발견 등 1930년대 물리학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
어네스트 러더포드 본인 업적에 못지않게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가 가르친 제자 중에 6명이 노벨상을 수상했고, 그가 이끌던 연구소 출신을 따지면 30명에 이르는 과학자들이 노벨상의 영예를 안게됐다. 21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뉴질랜드, 러시아, 캐나다, 스웨덴 등 네 나라의 우표인물로 선정될 만큼 학식과 존망을 함께 받은 어네스트 러더포드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아쉽게도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37 10월 그의 나이 66세 때였다. 러더포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뉴턴과 켈빈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Maurice Wilkins – DNA 분자구조 연구, 1962 노벨상

모리스 윌킨스는 1916 12 13일 북섬 Napier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있는 폰가로아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웰링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모리스는 여섯 살때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
모리스는 킹스 에드워드 하이스쿨을 졸업한 후 캠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1940년 버밍햄대학에서 물리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원자력연구에 종사하였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2년 동안 원자폭탄에 사용되는 방사선 동위원소를 질량분광기를 통해 분리하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맨하튼 프로젝트에서 나온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전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었다. 모리스는 이 일을 자책하며 반핵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 런던 대학 킹스 칼리지로 돌아가 의학연구부 생물물리실에서 DNA의 구조 결정과 RNA의 결정화를 연구하였다. 영국 출신의 생물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 미국 출신의 유전학자 짐 왓슨 그리고 여성과학자 로자린드 프랭클린이 모리스와 함께 했다.
1962년 핵산의 구조 결정의 업적으로 F. H. C. 크릭, J. D. 왓슨과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노벨상 선정 이유는 인간 생명의 핵심인 DNA의 분자구조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모리스가 받은 노벨상은 '원자폭탄 발명의 연루자'라는 오명을 벗어나기에 충분했다. 공동 연구자인 로자린드는 연구 중 방사선 때문에 암에 걸려 사망하여 애석하게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였다.

 

2000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Alan MacDiarmid과 우주 과학자 William Pickering는 다음 편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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