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역사이야기] 지명으로 알아 보는 역사이야기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역사이야기] 지명으로 알아 보는 역사이야기

Global Mobile07… 0 2257

Hobson St - 초대 총독 William Hobson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웰링턴의 주요 거리이름은 웰링턴으로 도착한 초기 이민선의 이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웰링턴의 주요 거리 이름은 이민선의 이름을 딴 오로라(Aurora), 쿠바(Cuba), 오리엔탈(Oriental), 록스버러(Roxbuugh), 애들레이드(Adelaide), 글렌버비(Glenbervie), 볼튼(Bolton), 코로만델(Coromandel)등이다.

크라이스트처치나 더니든도 초기 정착한 스코트랜드와 영국의 영향을 받은 지명이 많다.

이번 호에서는 오클랜드 시내 중심가 도로 이름(Hobson St)의 주인공 William Hobson에 관해 알아 보자. Hobson St Auckland 뿐만 아니라 Wellington, Manawatu, Whakatane 8개 지역에서 거리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윌리엄 홉슨은 뉴질랜드 초대 총독으로 와이탕기 조약 체결의 주인공이었다.

홉슨은 1793년 아일랜드 워터포드에서 법률가 새뮤얼 홉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03 8 25 2급 지원자로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 하였으며, 이후 캐러비안 해적 소탕에 참여를 하게 된다. 1806년 수습장교가 되었고, 7년 후 소위, 그리고 1824 5월에는 사령관으로 승진하게 된다. 1834 12월에 오클랜드경에게 임무를 부여 받아 래틀스네이크 호를 타고 동인도로 떠나게 된다.

1836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명령을 받아서 호바트에 1836 8 5일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18일 후에 시드니에 도착한다. 1836 9 18일에 래틀스네이크 호는 이후 멜버른이 되는 포트 필립스를 론즈데일 선장과 다른 관리를 싣고 새로운 식민지로 떠난다.

다음 3개월 동안 총독 리처드 버크의 지시로 홉슨과 그의 장교들은 필립 항을 철저하게 탐사한다. 이후 필립 항의 북쪽은 홉슨 만이라고 명명된다. 그의 배는 윌리엄즈타운을 세우는데 관여를 했다.

1837년 마오리족과의 전쟁의 위협을 당한 영국 거주민 제임스 부스비로부터 온 도움 요청을 받아서 뉴질랜드의 아일랜즈 만으로 항해를 떠났다. 당시만 해도 뉴질랜드는 호주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의 보호를 받는 지역이었다. 뉴질랜드에 살고 있던 제임스 버즈비(James Busby)라는 사람이 마오리 부족간에 전쟁이 심해 통제 불능상태에 있는 만큼 빨리 와서 틀을 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1837 5 26일 뉴질랜드에 도착했으며, 이 긴장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1838년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뉴질랜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그 보고서에서 캐나다에 있는 허드슨 만 회사와 유사한 회사를 차려서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 주권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1840년 윌리엄 홉슨은 총독이 되어 뉴질랜드를 찾아온다. 1840 1 29일 홉슨은 베이 오브 아일랜드(Bay of Islands)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영국인의 대리인으로서 와이탕이에 장기간 살고 있던 제임스 버스비의 집으로 가서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한 협의를 한다.

그리고 1840 2 6일 아일랜즈 만의 와이탕이 버스비의 집에 각지의 마오리 추장 46명을 모아 뉴질랜드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하는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그후 7개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전국을 돌며 500명 이상의 추장 사인을 받아냈으며, 39명의 와이카토 추장들을 제외하곤 모두 사인을 했다.

이 조약이 체결되고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하게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를 두 민족 국가로 규정짓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조약만 체결되면새 나라 건설로 한 몫 볼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초기 정착민(파케하)들이 홉슨의 정책에 반기를 든다. 영국 왕실은 뉴질랜드 땅을 정착민들에게 판매해 그 이익금으로 국가를 운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파케하와 마오리 사이의 조약의 문구를 이해하는 기준이 달라 토지 매입문제는 충돌이 생기게 됐고, 정착민들은 홉슨 총독이 자기들 편에 서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하기 시작했다. 파케하 정착민과의 불협화음으로 총독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던 홉슨은 마침내 영국 왕실에 소환을 받게 됐다. 결국 뉴질랜드를 세운건국의 아버지홉슨은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홉슨은 뉴질랜드 땅에 묻혔다. 1842년 갑작스럽게 재발한 중풍으로, 나이 49세에 아깝게 죽은 것이다. 조약 이후 2년 뒤인 1842 9월에 홉슨은 사망했고, 새로운 총독으로 로버트 피츠로이가 와서 마오리족의 관습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0 Comments
제목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