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 2-4 캔(KEN)농장 임근규 대표
일요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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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12:19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어깨에 새겨진 문신.
“우리 다 함께 온실 건축 한 번 해볼래요?”
일요시사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10년 이상 한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열 동 계획,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몇 년 내 황토방도 하나 짓고 싶어
“…일 할 사람을 찾기가 너무 힘들어요. 며칠 일 하다가 소리도 없이 그만두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여름에는 더워서 일하기 싫어하고요.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오고 추워서 일하기 어렵지요. 그렇다고 농사일이 수익이 엄청나게 많은 것도 아니고…… 주위 사람들이 나보고 땅값이 많이 올랐으니까 이제 힘든 일은 그만하라고 하지만, 나는 농사꾼이지 투기꾼이 아니에요. 그 정신이 평생 기쁘게 지고 갈 농사관이에요.”
<지난 호에 이어>
두 개의 문신으로 남을 사나이
”나는 한국사람이에요. 이 사실을 늘 잊지 않고 살고 있어요. 내 뿌리가 한국이라는 뜻이죠.”
임근규의 양어깨에는 문신이 하나씩 있다. 왼쪽 어깨에는 태극기 문양과 코리아(Korea)라는 글자가, 오른쪽 어깨에는 ‘림’(林, 수풀)자가 새겨져 있다.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차카게 살자’라는 조폭의 의미(?) 없는 문신 따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림’은 아버지가 물려준 그의 성이고, 태극기는 대한민국이 인정해준 그의 소속이다. 아버지(조상)가 물려주고 국가가 넘겨준 시대적 사명을 잘 지켜 살겠다는 게 그의 인생관이다. 거친 어깨 근육 사이로 자신감이 꿈틀댄다.
“언젠가 이런 상상을 해봤어요. 내가 갑자기 신분증도 없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는다면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하는 불안 같은 것 말이죠. 그래서 내 정체성을 알려주기 위해 문신을 했어요.”
물건 납품하는 장사꾼으로 전락하기 싫어
임근규는 2012년 7월, 헬렌스빌(Helensville)에 있는 땅을 샀다. 제2의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웨누아파이(Whenuapai) 임대농장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만 했던 때였다. 임대농장을 넘겨준다는 얘기는 한국작물을 심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 농사꾼으로 불릴 수도 없다. 키위 공판장에만 물건을 납품하는 장사꾼으로 전락하기는 싫었다.
데어리 플렛(Dairy Flat)에 정착한 지 만 5년, 또 한 번의 승부수를 던졌다. 55에이커(66,000평) 땅이 그의 눈앞에 놓였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문턱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잘못 했다가는 인생 후반전이 비참해질 수도 있는 기로였다.
“땅을 사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뒤 열 번 이상은 가 봤을 거에요. 볼 때마다 땅이 더할 나위 없이 예뻤어요. 내가 어깨너머로 배워 풍수를 조금 보는데, 그 어디 하나 부족한 데가 없었어요. 뉴질랜드 농사의 대운이 여기서부터 뻗어질 거라 믿었지요.”
그는 일 주일, 한 달 내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새 땅을 개척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달이 들 때까지 일했다. 가족 외에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한 평, 두 평 땅에는 파란 기운이 돋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빚어낼 수 없는 자연의 색깔이었다.
그렇게 땅은 비옥해져 갔다. 따로 거름을 치지 않아도 윤기가 더해졌다. 사람의 힘은, 아니 농사꾼 임근규의 힘은 빛이 났다. 온실 한 동(약 120평)을 짓고 또 한 동을 지었다. 한두 달만 지나면 새색시 하얀 볼처럼 온실 하나가 대지를 빛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열 한 동의 온실이 마련됐다.
“한 번 지으면 짧게는 오십 년, 길게는 백 년까지 가지요. 중간중간 비닐만 갈아주면 되고요. 앞으로 수백 개를 지어도 될만한 공간이 내게 있어요. 이 공간을 나만의 공간이 아닌 우리 교민의 공간으로 공유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여섯 달 내로 온실 열 동 지을 계획
온실 열 동을 짓기 위해 한국에서 수입한 자재들.
임근규는 이쪽 분야 전문가이다. 온실 하나 짓는 거는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종종 온실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렇다고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런저런 방안을 강구 중이다. 그중 하나.
“온실 건축 교실 같은 것을 하나 만들고 싶어요. 온실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직접 지어 보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술도 익히게 되겠지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농사꾼이라면 모두 흙의 아들딸들인데, 굳이 경쟁하며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첫 시동을 얼마 전 걸었다. 열 동의 온실을 짓겠다는 계획에 맞춰 진행되고 있다. 날씨에 따라 일 진척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기초 공사는 어느 정도 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여섯 달 내로 끝내겠다는 게 임근규의 복안이다. 이 일을 위해 한국 돈으로 1억에 가까운 자재도 들여왔다.
“누구든 환영해요. 조건 없이 가르쳐 드릴게요. 부담 없이 농사가, 온실 짓는 법이 궁금한 사람들은 찾아오세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성심껏 도와 드릴게요. 교민들이 온실 때문에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본만 알면 되거든요. 내가 힘이 되어 드릴게요. 많이들 오세요.”
임근규 김순희 부부의 세 딸. 엄마 아빠의 귀한 일꾼이기도 하다.
한국식 황토방도… ”실질적 도움 주고 싶어요”
온실 공사가 끝나면 또 다른 일도 할 계획이다. 교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일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한다.
“뉴질랜드 겨울 지긋지긋하잖아요? 하루가 멀다고 비는 오지, 그렇다고 어디 가서 편히 쉴 데는 없지. 그래서 한국식 황토방 같은 것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해요. 다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삼삼오오 모여 몸을 한번 뜨겁게 지져 보는 것이지요. 좋은 생각 아닌가요?
왜 아닌가? 그저 그의 생각이 불현듯 스쳐 간 한 때의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한두 해 내로 실행에 옮겨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헬렌스빌 농장 한 구석 어딘가에 황토방에 세워질 날이 올 것이다.
한국과 뉴질랜드 농사 경력을 합치면 30년이 넘는다. 그가 보는 농사관은 무엇일까?
“짐작하시겠지만 농사일이 절대 쉽지 않아요. 일 할 사람을 찾기가 너무 힘들어요. 며칠 일 하다가 소리도 없이 그만두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여름에는 더워서 일하기 싫어하고요.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오고 추워서 일하기 어렵지요. 그렇다고 농사일이 수익이 엄청나게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나는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이 일을 하려고 해요. 주위 사람들이 저보고 땅값이 많이 올랐으니까 이제 힘든 일은 그만하라고 하지만, 나는 농사꾼이지 투기꾼이 아니에요. 그 정신이 평생 기쁘게 지고 갈 농사관이에요.”
맞다. 취재를 하다가 그의 일을 조금 도와주었던 적이 있다. 열다섯 포기가 든 배추 상자를 큰 차에 옮기는 일이었다. 한 시간쯤이나 했을까? 이마에 땀이 비오듯 흘렀다. 체면상 힘들다고 할 수 없어 이를(?) 물고 해냈다. 그 다음 날, 내 허리에서 신호가 왔다.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 비슷한 일을 임근규는 날마다 하고 또 한다. 농사꾼의 운명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경운기, 탈곡기 고장 나도 걱정 하나 없어
임근규가 뉴질랜드 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농기계를 포함, 기계류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의 농장에는 갖가지 공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심지어는 용접 기계까지 있다. 경운기가 고장 나도, 탈곡기가 애를 먹여도 따로 전문가를 부를 필요가 없다. 임근규가 바로 ‘그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청년 시절, 모터바이크 수리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요. 그때 밤을 새워서 엔진을 뜯어내고 다시 조립했지요. 그러면서 하나둘 기술을 배웠어요. 눈썰미도 좀 있지만, 수 없이 연습에 연습한 결과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뺨 싸대기도 수차례 맞았고, 인간적인 수모도 많이 겪었지만 그 경험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어요. 이렇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조금은 놀랍기는 하지만요.”
노지 농사를 위해 준비 작업을 하는 모습.
데어리 플렛에 상가 몇 개 만들고 싶어
데어리 플렛에 있는 온실 겸 가정집은 내가 봐도 몫이 좋다. 모터웨이 길가에 자리 잡고 있어 사업적인 수완만 조금 잘 쓰면 돈도 좀 되지 않을까 보인다.
아내 김순희의 말.
“길가 쪽으로 상가 몇 개를 만들고 싶어요. 식품점도 내고, 한국 뷔페식당도 하나 차리고……. 그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가 가진 꿈이에요. 그러다 아이들이 크면 하나씩 물려주기도 하고요. 아마 종설이 아빠(임근규)는 식당에서 손님상을 기웃기웃하며 술 한 잔 건네겠지요. 그게 세상에서 제일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농사일 끝나면 독서삼매경에 빠져
농사꾼 임근규의 얘기를 정리할 때가 됐다. 그를 열 차례 가깝게 만났지만, 한 번도 지루한 적이 없었다. 많이 배우지는 않았지만 여러 방면에서 해박했다. 그 힘은 아마, 그의 농장 구석방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에서 나왔을 것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을 비롯해 수많은 대하소설과 역사책들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게 시간 보내기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순간, 나는 임근규가 그냥 단순한 농사꾼으로만 기억돼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훗날 뉴질랜드 교민사회를 빛낸 한 사람으로 기록될 거라고 믿는다.
마지막 취재가 끝나고 늦은 밤 오클랜드로 돌아오던 날, 데어리 플렛 밤하늘에 떠 있던 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별이 빛나는 밤에’, 임근규와 그의 아내 김순희 그리고 다섯 자식 종설, 종성, 혜련, 혜수, 혜진이의 편안한 밤을 기도했다.
글_프리랜서 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