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소설


 

오문회 0 1983
빨간 고무장갑 어디에 구멍이 생긴 모양이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물이 스며드는 느낌이 든다. 가위질을 한 적도, 게 집게다리를 다듬은 일도 없는데 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겉보기로는 아직 멀쩡해 보이는데 버리려고 하니 아깝고 괜히 화가 치밀기도 한다. 혹 손바닥에 장갑을 뜯어먹는 귀신이라도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번 마음속으로 푸닥거리를 한다.

 장갑의 긴 손목 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 허공에다 몇 번 휙휙 돌려가며 공기를 잡아넣는다. 손 귀신이 공기를 잔뜩 삼키고 혼 돌림을 하여 방귀라도 뀌게 할 심사였다. 빵빵 하게 부푼 빨간 장갑 어디선가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재빨리 코와 귀에 갖다 댄다.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는 사이 작은 솜털들이 자지러지면서 구멍의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걸 다시 확인하고자 바람이 다 빠질 때까지 비틀어 짠다. 되살릴 기미가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셈이다. 바람 빠진 고무장갑은 찌그러진 채 작은 내 손바닥에 한줌의 재처럼 뭉그러져 있다. 마지막 숨소리를 듣는 듯 마음이 편치 않다. 더구나 쓸모 없어진 장갑 한쪽을 미련 없이 내다 버리려니 생사를 갈라놓는 저승사자가 된 듯 기분이 언짢다.

 남은 한쪽을 싱크대 위에 걸쳐놓고 아래쪽 작은 서랍을 열었다. 그곳엔 짝 잃은 고무장갑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다. 닮은 모습으로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새 짝을 만나기 위해 늘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다. 눈썰미가 있는 나는 가장 오래 기다려온 녀석 하나를 주저 없이 꺼냈다. 싱크대에 걸쳐있는 것과 합궁을 시키려 하니 자꾸만 어긋나려 한다. 공교롭게도 두 개의 왼쪽장갑은 처음처럼 어울릴 짝이 아니다. 변화가 필요하다. 

복잡한 성형을 거치지 않아도 손쉽게 뒤집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늘 손가락 끝부분은 무슨 미련이 남아있는지 한 번에 뒤집힌 적이 드물다. 하는 수없이 입김으로 또 공기를 불어 넣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어느새 빨간 몸뚱이가 허옇게 바뀌면서 오른손에 맞게 몸 바꿈을 한다. 짝짝이로 만난 고무장갑은 종종 수줍은 커플이 되어 내 열 손가락을 걸고 충성을 다짐하고는 차츰 손에 익숙해진다.

 방학 중에 잠시 집에 와 있던 아들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독립한 녀석의 설거지 실력은 웬만한 집 처자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고무장갑을 건넸다. 매번 짝짝이를 받아 든 녀석은 어느 쪽으로 끼워야 하는지 두리번거리지도 않은 채 능숙한 솜씨로 장갑을 낀다. 어쩌면 양손을 구분하기 위해 내가 일부러 색이 다른 고무장갑을 사용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뒤집힌 한쪽 고무장갑이 제법 미끄럽기 때문에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들에게 조심하라는 잔소리도 한다. 녀석의 손끝에 따라 달그락거리는 그릇들은 물소리와 함께 합창을 하는 듯 매끄러워 보인다. 마지막으로 싱크대 주변과 수도꼭지의 물기를 닦는 것도 잊지 않는 아들은 어느새 설거지의 달인이 되었나 보다.

 최고의 남편감이 아니냐고 너스레를 떠는 아들 녀석의 말이 어느새 수돗물 소리와 함께 내 마음속에 채워지고 있다. 요즘 자주 들떠 있는 녀석의 목소리는 사랑에 빠져 있음을 나는 눈치 챈다. 뱃속에 열 달을 품고 있는 동안 우린 탯줄을 통해 생명뿐 아니라 생각을 공유했기 때문에 눈빛이나 말소리만으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어른이 되면 엄마와 결혼할거라고 했던 그 꼬마시절은 지나고 어느새 진지하게 짝을 찾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 짝이 나를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슬프거나 외롭지 않은 흡족한 배신감이 은근히 나를 위로한다.

 이제 스무 살 중반을 넘겼으니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을 것이고, 나의 긴 머리를 유난히 좋아하는 녀석이니 왠지 그 아가씨의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가 연상되기도 한다. 꽃병에 꽂은 하얀 안개꽃이 나를 닮았다고 귀띔을 주는 것 같다.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밝고 환한 웃음의 참 맛을 아는 아가씨였으면 하고 나름대로 상상해 본다.

 아들이 사귀고 있을 처녀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출산 후 불어나던 젖가슴처럼 자꾸 부풀어 오른다. 설레는 마음 사이로 이런저런 생각의 가지들이 비집고 나오고 있다. 자꾸만 분비되는 불확실한 편견 때문에 이따금 뜻 아닌 젖몸살을 앓을 것도 같다. 어느새 나는 부모의 잣대로 세상에 서 있다. 젖을 충분히 물렸음에도 은근히 아려오는 젖몸살을 짝짝이 고무장갑이라도 끼고 짜내야 할 것 같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가 재혼소식을 알려왔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했던 결혼생활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던 그녀의 오래 전 넋두리가 귀에 맴돈다. 이혼의 아픔으로 성숙된 삶을 배우게 되었다는 그녀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탈바꿈한 고무장갑이 되어 새로운 짝을 만나게 되었다.가슴으로 축하하고 나니 젖몸살이 조금은 가라앉은 듯 편해진다. 

저자 정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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