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오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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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2016.01.07 13:24
가브리엘 포레의 파반느가 실크처럼 휘감기는 카페에 앉아 창 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다. 가을이 이 거리를 통과하고 계신건가. 은행나무들이 일제 사열 중이다. 봄여름 동안 존재감 없이 서 있던 나무들에 황금나비 떼가 북적이기 시작하면 가을은 급격하게 조락으로 치닫는다. 익은 노랑빛으로 차오르는 계절, 에스프레소 잔이 식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커피한테 어느 계절과 한 잔 하실 거냐고 물어본다면 가을이랑 하겠다 할 거라고. 초가을이 아메리카노라면 늦가을은 에스프레소다. 깊고 그윽한 커피향과 어우러진 포레의 선율이 내 안의 와디를 느리게 적신다. 눌러 두었던 감상(感傷)이 마른 물길을 따라 스멀스멀 번져온다. 뜨거운 혓바닥을 가진 불뱀 한 마리가 핏줄을 타고 거슬러 오르는지 명치 어디쯤이 알싸하게 아프다.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늙어가는 여자에게도 가을은 위험하다. 머리칼을 날리는 바람결 하나에도 애써 잠가둔 안전핀이 순식간에 뽑혀나갈 수 있는 나이, 그 나이쯤 되어 봐야 아름다운 것들 속에 감추어진 슬픔도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극기(克己)에는 마조히즘적 쾌감도 있는 법, 둑이 터져 넘치기 전에 서둘러 털고 일어나야 한다.
공원 옆 길, 늦게 핀 구절초들이 해쓱하게 웃고 있다.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관리 중이지만 갈급한(*사람이 무엇에 속이 마를 지경으로 몹시 바라다)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듯, 수척하게 야윈 낯빛들이다. 해끗한 이마 어디쯤에 죽음이 한 발을 걸쳐놓고 있는데도 저리 천연스레 웃을 수 있다니. 강적(强敵)이다.
고수다. 대단한 전략가다. 연약한 듯 노련한 포커페이스들 앞에, 웃음을 무기로 원하는 바를 쟁취해내려는 목숨의 저 비장함 앞에, 나는 그만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싶어진다.둥근 둘레를 풀어헤친 나무 아래로 늦가을 같은 여자 하나 휘적휘적 걸어간다. 변심한 애인처럼 가을이 가고 머지않아 눈이 내릴 것이다. 그렇게 해가 갈 것이다. 그렇게 한 생이 흘러갈 것이다.
저자 최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