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의 힘

손바닥소설


 

없음의 힘

일요시사 0 1901


  어둑새벽, 산사山寺의 뜰.  등 굽은 노승이 비질을 한다. 

  ‘싸그락 싸그락….’ 

  싸리비 마당을 스칠 때마다 고요 그만큼씩 무너지고, 흙먼지 연기처럼 일었다 스러진다. 능선 너머 희붐하게 밝아오는 빛, 조심스레 정갈한 마당에 발을 들이면 문득 울리는 범종 소리. 도량을 돌아 굽이굽이 산을 넘으며 삼라만상을 깨운다. 

  운보 김기창의 화집을 뒤적이다가 그림 하나에 눈길이 멎었다. <새벽 종소리>였다. 그런데 그림 어느 구석에서도 종은 보이지 않았다. 구부정한 어깨로 비질을 하고 있는 스님 한 분과, 암자 한 채, 그리고 삼층 석탑 뒤로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청록빛 산들이 성긴 붓질로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여백을 메우고 있는 것은 엷은 오렌지빛. 여명이다. 

그런데 그 그림에서는 종소리가 들렸다. 비질하는 노승과 오렌지빛 여백. 운보는 그 두 가지 만으로 새벽에 울리는 산사의 종소리를 그려낸 것이다. 여덟 살 때 열병을 앓아 청력을 상실한 운보. 아마도 그는 청력을 잃기 전 어느 여름날 외할머니를 따라 산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을 것이고, 고요한 새벽에 들었던 종소리가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운보의 작품에는 소리를 그린 것들이 꽤 있다. <군작도群雀圖> <군마도群馬圖> <군해도群蟹圖>가 그러하고, <정청靜廳> <아악의 리듬> <흥락도興樂圖>, 그리고 돌돌 흐르는 개울물과 소잔등에 올라 피리를 불고 있는 아이가 자주 등장하는 청록산수들이 또한 그러하다. 그 그림들에는 모두 소리를 내는 대상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새벽 종소리>에는 그 대상이 보이지 않는다.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보이지 않는 대상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 그림에는 소리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절절히 배어 있는 것 같다.

  없음의 힘이 그림에만 머물까? 강주사마로 좌천된 다음 해 어느 가을 밤, 백거이는 손님을 배웅하러 심양강가에 이른다. 배에 올라 손님과 이별주를 나누는데 음악이 없어 쓸쓸하고 울적하다. 그때 홀연히 비파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배를 저어 가 가까이 댄 다음 한 곡조 더 들려줄 것을 간곡히 청한다. 마침내 얼굴을 반이나 가린 여인이 배 안에서 비파를 안고 나와 앉는다. 줄을 고르며 두어 번 현을 튕기는데 곡조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 소리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이윽고 연주가 시작된다. 현을 절제하며 소리소리 생각이 깃드니 마치 평생에 얻지 못한 뜻을 하소연하는 듯하다. 때론 소낙비처럼, 때론 속삭임처럼 크고 작은 소리들이 어우러져 마치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반에 떨어지는 듯하고, 봄날 꾀꼬리 소리처럼 매끄러운가 하면 얼음 밑을 흐르는 여울물 소리인 듯 그윽하더니 갑자기 물이 얼어붙어 흐름을 멈추듯 현이 한데 엉키며 소리가 끊어진다. 이어 흐르는 침묵. 그런데 어쩐 일일까. 그 소리 없음에서 도리어 깊은 한이 풍겨 나온다. 

 此是無聲勝有聲 차시무성승유성

백거이는 이를 ‘소리 없음이 소리 있음을 능가한다.’ 라 하며 무릎을 친다. 백거이의 <비파행琵琶行>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한때 장안에서 손꼽히던 기녀였다. 13살에 비파를 배워 일가를 이루면서 교방敎坊 제일부第一部에 속하게 된다. 온갖 찬사와 함께 금붙이며 비단이 쏟아지던 시절이 꿈같이 흐르고 나자 몰락의 길이 이어졌고 마침내 늙어 장사치의 아내가 되었다. 장사치는 이윤만을 ?아 떠돌 뿐 음률에는 관심이 없다. 

늦은 밤, 강가를 서성이다 홀로 빈 배에 앉아 있으려니 달빛은 밝고 강물은 차다. 문득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니 서러움이 북받쳐 비파로 마음을 달래본다.  좔좔 흐르던 물이 얼어 멈추듯 소리가 끊어진 것은 나락으로 떨어진 지금 자신의 신세를 말함이요, 뒤를 이어 흐르는 침묵은 회한이다. 여인은 그 심경을 소리 없음으로 대신하였고 백거이는 그것을 읽어낸 것이다. 

   就中泣下誰最多 江州司馬靑衫濕 취중읍하수최다 강주사마청빈습 

  그중에도 누가 가장 많이 울었는가, 강주사마 푸른 소매가 흠뻑 젖었음이라 <비파행>의 마지막 구절이다.운보는 여백으로 그리움을 그려냈고, <비파행> 속의 여인은 묵음으로 한을 풀어내었다. 절절함이 크면 마침내 비워지는 것일까. 붓으로, 소리로 다 할 수 없는 것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간절함을 그들은 ‘없음’으로 대신한 것이다. 

 행간에 뜻을 담아보겠다고 말을 아끼고 덜어내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다가, ‘내가 담고자 하는 뜻이 간절한가?’ 라는 물음에 이르면 그만 길을 잃고 만다. 

저자 이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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