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빛낸 100명의 위인 <3>
일요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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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2 12:32
11.William Hobson – 와이탕이 조약 공동발의자
윌리엄 홉슨(William Hobson RN, 1792년 9월 26일, – 1842년 9월 10일) 선장은 최초의 뉴질랜드 총독이었으며, 와이탕이 조약을 맺은 당사자이다. 윌리엄 홉슨은 1837년 마오리족과의 전쟁의 위협을 당한 영국 거주민 제임스 부스비로부터 온 도움 요청을 받아서 1837년 5월 26일 뉴질랜드에 도착했으며, 이 긴장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1838년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뉴질랜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그 보고서에서 캐나다에 있는 허드슨 만 회사와 유사한 회사를 차려서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 주권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1840년 윌리엄 홉슨이 총독으로 뉴질랜드를 찾아온다. 그는 당시 영국인의 대리인으로서 와이탕이에 장기간 살고 있던 제임스 버스비의 집으로 가서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한 협의를 한다. 그리고 1840년 2월 6일 아일랜즈 만의 와이탕이 버스비의 집에 각지의 마오리 추장 46명을 모아 뉴질랜드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하는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한다. 그 후 7개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전국을 돌며 500명 이상의 추장 사인을 받아냈으며, 39명의 와이카토 추장들을 제외하곤 모두 사인을 했다.
이 조약이 체결되고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하게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를 두 민족 국가로 규정짓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그 조약 이후 2년 뒤인 1842년 9월에 홉슨은 사망했고, 새로운 총독으로 로버트 피츠로이가 와서 마오리족의 관습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12.William Pickering – 우주과학자
William Pickering은 우주 탐사의 대명사인 미국 제트추진연구소의 총 책임자 이었다.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 탐사 경쟁에서 미국 쪽 책임자였다. 뉴질랜드 웰링톤 태생인 William Pickering은 지금은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인 말보로에 있는 헤브록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웰링톤 칼리지를 다녔다. 캔터베리대학에 입학해서 1년을 다니고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1944년 William Pickering은 교수생활을 하면서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에 몸 담는다. 12년 후 그는 연구소의 총 책임자가 됐다. 1957년 10월 러시아는 세계최초로 인공위성(Sputnik)을 우주에 쏘아 올렸다.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체제의 한 복판에 있었다. 군사적인 분야에서 양보 없는 경쟁 중이었다. William Pickering이 주축이 된 제트추진연구소는 다음 해 1월 31일 ‘Explorer 1’호 발사에 성공 한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러시아를 제치고 우주산업에서 한 발 앞서가는 발판이 되었다.제트추진연구소는 우주탐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Explorer 3’호는 Van Allen Belt(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방사능을 가진 층)를 발견했으며, 1962년에는 화성 및 금성 탐색용인 무인우주선 ‘Mariner 2’호를 발사해 금성의 온도를 처음으로 기록하는 과학사의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William Pickering은 1941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그가 뉴질랜더로서 세계 역사에 끼친 공을 충분히 인정해 1976년에는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으며, 2003년에는 뉴질랜드 최고영광인 ‘The Order of New Zealand’를 받았다. William Pickering은 2004년,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알바니에 있는 William Pickering 로드는 뉴질랜드가 낳은 위대한 과학자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길이다.
13. 로버트 데이비드 멀둔(Robert David Muldoon) 1921년 9월 25일 ~ 1992년 8월 5일
뉴질랜드의 31대 총리(1975~1984)이다. 오클랜드에서 출생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에서 회계학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에는 오클랜드 회계회사의 공동 경영자가 되었다가, 1960년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부터 3년 동안 재무장관을 지내다가, 1972년에는 부총리가 되었다.
1974년 국민당의 당수가 되었으며, 1975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을 꺾고 총리에 취임하였다. 그의 국민당은 1978년과 1981년에도 압승하여, 멀둔은 총리 자리를 지키게 된다. 총리 재임 동안에 1976년과 1981년에 한국을 방문하였다.1984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여, 7월 26일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992년 8월 5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4.Maurice Wilkins – 노벨과학상 수상자
모리스 윌킨스는 1916년 12월 13일 북섬 Napier에서 100여km 떨어진 곳에 있는 폰가로아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웰링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모리스는 여섯 살때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모리스는 킹스 에드워드 하이스쿨을 졸업한 후 캠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1940년 버밍햄대학에서 물리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원자력연구에 종사하였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2년 동안 원자폭탄에 사용되는 방사선 동위원소를 질량분광기를 통해 분리하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맨하튼 프로젝트에서 나온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전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었다. 모리스는 이 일을 자책하며 반핵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 런던 대학 킹스 칼리지로 돌아가 의학연구부 생물물리실에서 DNA의 구조 결정과 RNA의 결정화를 연구하였다. 영국 출신의 생물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 미국 출신의 유전학자 짐 왓슨 그리고 여성과학자 로자린드 프랭클린이 모리스와 함께 했다.
1962년 핵산의 구조 결정의 업적으로 F. H. C. 크릭, J. D. 왓슨과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노벨상 선정 이유는 인간 생명의 핵심인 DNA의 분자구조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모리스가 받은 노벨상은 ‘원자폭탄 발명의 연루자’라는 오명을 벗어나기에 충분했다. 공동 연구자인 로자린드는 연구 중 방사선 때문에 암에 걸려 사망하여 애석하게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