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히

손바닥소설


 

무단히

오문회 0 1355
한 여름이다. 연일 폭염으로 숫자를 더해 가는 기온이 거의 살인적이다. 만물을 푹푹 찐다. 작은 일을 해도 땀이 비오 듯 줄줄 흐른다. 찬물 덮어쓰기를 하루에 몇 번씩 해도 돌아서면 그뿐이었다. 이럴 때 무단히 배에 화상을 입었다. 쓰라린 마음의 땀이 소낙비가 되어 가슴에 쫙쫙 쏟아진다.

며칠 전 멸치 볶음을 한 냄비에 배를 데였다. 가스 불 옆 싱크대가 목판이라 달구어진 냄비를 개수대 옆의 쇠 싱크위에 갖다 놓았다. 그 순간 냄비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이 기울었다. 그걸 막는다는 것이 반사적으로 배를 뜨거운 냄비에 쑥 내밀고 말았다. 바보,등신, 머저리 하면서 아이처럼 덤벙댄 나를 나무라 붙였다. 싱크대에 있는 그릇 바구니를 치우고 냄비를 놓아야 했는데. 멸치를 다 쏟아 버린다 해도 만원안쪽이다. 그게 아깝다고 이리도 미욱했을까. 안 해도 될 생고생을 해도 천만번 싸다.

그때 공교롭게도 상의를 둘둘 말아 배꼽티를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 부위에 살을 노출하고 있던 터였다. 모기가 허리를 물어 약을 바른 후였기도 하고, 불앞에서 요리를 하느라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연중에 젊은이들 흉내를 내 보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필, 그 시간에, 왜,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사고의 원인 제공에 모기란 놈이 거들었겠다. 밉다 밉다하면 더 미운 짓만 한다더니 모기가 딱 그 짝이 아닌가. 그로 인해 덴 곳에 금방 붉은 꽃이 피었고, 몇 시간 지나자 큼지막한 수포가 생겼다. 하는 수 없이 외과 치료를 이틀마다 받고 약을 복용한다. 모기를 원망해야 할지. 아무래도 방만했던 나를 탓해야 옳을 것이다. 어쨌든 어정쩡한 내 마음가짐과 무단히가 문제다.

사정이 이러한 때, 지인 세 네 명과 해수욕을 가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해수욕을 해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그 제안에 무조건 쌍수를 들었다. 해수욕이 뭐 대수라고 맺힌 한을 풀,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지레 설렜다. 지인 아들의 직장 휴양지가 바닷가에 있어 그 덕을 보겠다고 날짜만 손꼽았다. 모기가 안 하던 짓을 하려는 나를 말리느라 그랬을까. 아니면 내가 모기약을 뿌리고 향을 피우니까 앙심을 품었을까.

그도 아니면 배꼽티를 한번 입어보라고 그랬을까. ‘그래 내 주제에 무슨 해수욕이랴.’ 한나절 내내 웃음이 실실 나왔다. 그래도 해수욕을 못하게 된 애석함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쳐버린 미련만큼 하다.

무단히 화상을 입어 더위에 목욕도 못하고, 친구들과 약속도 못 지키고, 병원 다니는 것도 번거롭고, 돈만 까먹는다고 동네의 친근한 의사 앞에서 절로 푸념이 나왔다. 그때 의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리며 툭 던지는 말이 명답이었다. “그 무단히가 동네 의원들의 밥줄이 되는 것이 아니겠냐” 고 했다. 나는 무단히 다치는 사람이 있으므로 병원 수입과 직결된다는 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들었다. 나도 “무단히가 상부상조 역할을 하는 군요” 라고 몇 마디 거들었다. 크고 작은 사고들이 모두 예견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뿐인가. 무단히 잠이 안 오고, 우울하고, 외롭고, 그립고, 즐거울 때도 있다. 그리고 내가 어쩌지 못하는 세상사도, 철썩 같이 믿는 식구들도 밉다. 그럴 때는 널뛰듯 뛰는 못난 감정을 잠재우지 못한다. 감정에 치우쳐 내 마음 밭에 좁쌀만 널려 있다는 자괴감마저 든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끼는 집에서부터 살림살이까지 다 구질구질해 보이고, 마당에 버티고 선 나무들도 이건 키가 너무 커서 부담스럽고, 저건 낮아서 정이 안가고, 또 숲이 성글어 성에 안찬다. 청아한 새 소리도 시끄럽게 들리고, 비좁은 마당도 더 갑갑하다. 하늘의 짙은 구름을 뽀송하게, 먼지를 일게 하는 센 바람을 순하게 바꾸고 싶다. 이 모두 무단히 생기는 변덕이 주범이다. 다양한 감정을 운전하는 게 변덕임에야. 누굴 탓하리.

무단히 생청을 쓰던 철없는 아이 때문에, 무단히 트집을 잡던 무정한 남편 때문에, 무단히 억지를 부리던 못 말리는 어른 때문에 마음이 상했던 것도 다 무단히 때문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랬다는 것을 진즉 알았다면 그다지 힘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무엇이든 지나봐야 아는 걸 보면 내 철듦이 항상 한 템포씩 늦다.

오늘은 무단히 집과 살림살이가, 마당의 나무들이, 식구들과 자신이, 세상사가 모두 안쓰럽다. 그것을 넘어 너무 불쌍했다가 정말 고맙다. 이럴 때는 내 마음 하나로 감정을 사르르 녹여 냈다고나 할까.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인연을 맺는 것도 무단히 이루어질 때가 있다. 특히 젊은 남녀가 결혼 상대를 타지에서 만나면 흔히 인연을 만들려고 그곳에 갔다라고 한다. 무단히가 중매쟁이도 된다. 좋은 인연이 있고, 나쁜 인연이 있기에 무단히는 긍정과 부정의 측면으로 상반된다. 그래도 우리는 한 쪽만 ?을 수 없다. 무단히의 습성이 내 의지와 상관없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그 어떤 것도 가정이 있을 수 없다고 하듯 무단히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속에 늘 잠재한다. 결코 따돌릴 수 없다. 아무런 계산이 없는 만큼 순수하다. 무덤덤, 무연히, 무심코, 무심결도 무단히와 사촌쯤 될 성싶다. 무단히가 좋은 일만 안겨주길 조용히 소망해 본다. 그런 행운으로 가슴 떨어 보고 싶다.

저자 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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