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5-2) 한인 역사의 산 증인 변경숙 씨
문화 차이로 싸움만 1만5천 번…선원 도우며 향수 달래
“나는 네 엄마가 아니다” 말 듣고 시댁 향한 섭섭함 열두 해 이어져
“어느 날 집에 완전 무장을 한 경찰 두 명이 들이닥쳤다. 남편 로이 윌슨이 아내 변경숙을 기물파손죄와 공갈협박죄로 신고한 것이다. 홧김에 한 “다 죽여 버리겠다”라는 말에 겁이 난 남편이 문화 차이로 잘 못 알아들었다. 권총을 찬 육 척 장신의 경찰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흉악한 범죄자가 아닌, 여리디여린 한 동양 여자가 울고 있었다.
‘열흘 운 년이 보름은 못 울어.’
오래전 MBC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프로에서 순돌이 엄마 역을 맡은 인기 탤런트 박원숙이 펴낸 책 제목이다.
변경숙을 처음 만난 날, 나는 이 책 제목이 떠올랐다. 울고 또 울어도 울음이 그치지 않던 이방 여자의 한(恨)을 느낄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밖에 없었어요. 시집을 올 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태평양 바다에 빠져 죽을망정 결코 한국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거든요. 울어도 울어도 울음이 샘솟았어요. 수건으로 쥐어짤 정도로 눈물을 흘렸어요.
절해고도에 홀로 떨어진 심정이었다
1980년 5월 어느 날. 웰링턴 공항에 내린 변경숙은 이때부터 문화 충격을 실감한다. 2016년 우리가 느끼는 문화 충격과는 견줄 수 없었다. 그 당시 웰링턴에 사는 한국 사람이라고는 대사관 직원과 몇몇 유학생이 다였다. 속 맘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다. 절해고도에 홀로 떨어진 심정이었다.
에피소드 하나.
경숙이 시집올 때 시부모 선물로 인삼을 준비해 왔다. 가장 비싸고 좋은 최상품이었다. 하지만 이 인삼은 예쁘게 포장되어 다시 경숙에게 전해졌다. 그때 경숙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동양 여자라고 며느리 취급을 해 주지 않는구나.’ 시어머니 루시의 생각은 이랬다. ‘이 귀한 걸 내가 먹을 줄 모르니 당연히 돌려주어야지.’
에피소드 둘.
경숙은 시어머니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 자기 딴에는 곰살맞게 한다며 “어머니~(Mum)라고 불렀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네 엄마가 아니다. 루시라고 불러라.” 그때 경숙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동양 여자라고 무시하는구나.’, ‘내가 한국 여자라고 나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 뒤 시댁을 향한 섭섭함은 열두 해나 이어졌다.
에피소드에 숫자를 매긴다면 아마 백 아니 천까지도 갈 것이다. 내 추측이 아니다. 경숙이 진지하게 말한 것이다. 자기는 지금까지 로이 윌슨과 살아오면서 1만5천 번 정도 싸웠다고 생각하는데, 남편 로이는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고 했다. 이거야말로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충격이 아닐까 싶다.
로이 윌슨 한국전쟁 참전하려고 했다
변경숙의 남편 로이 윌슨은 1954년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다. 먼저 온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이는 한국전쟁 때 참전하려고 했었다. 이 지구 위에 하나님이 버린 땅이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고 했다. 절차를 밟는 사이에 다행히 전쟁이 끝나 로이는 한국 대신 뉴질랜드행을 택했다.
1962년 한국과 뉴질랜드 사이에 정식 수교가 맺어졌다. 그 뒤 한국 원양어선이 웰링턴 항을 비롯해 뉴질랜드 여러 부두에 배를 댔다. 웰링턴 부두, 한국 배가 주로 정박하는 바로 앞에 로이가 일하는 뉴질랜드 포스트 뱅크(NZ Post Bank)가 있었다. 로이는 거기서 재무 일을 맡아 했다.
“남편은 선천적으로 긍휼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사람을 절대 외면하지 않았어요. 1970년대 초 어떤 계기로 한국 선원을 도와줬는데, 그 뒤부터 로이는 한국 사람의 대부 같은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그 인연으로 저도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고요.”
말 설고 낯 설은 뉴질랜드 땅에서 경숙이 한국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상대는 원양 어선 선원들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차 한 잔 우아하게 마시며 즐기는 삶이 아니라, 비릿한 생선 냄새 폴폴 풍기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들의 애환을 듣거나 고충을 해결해 주는 일이었다. 물론 해결은 다 남편 로이가 했고, 경숙은 그 사이에서 통역만 했다. 경숙은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거친 남자를 숱하게 만났어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80년대 초 원양어선에서 일하는 선원은 막장 광부 못지않은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어요. 제가 그들에게 같은 동포로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려고 애를 썼어요. 어쩌면 그게 제가 고국의 향수를 달랜 방법인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한 해 두 해 새 환경에 적응했을 거예요.”
큰 슈퍼에서 사골뼈를 사재기(?) 하다
이 대목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추가해볼까 한다.
경숙은 몇몇 선원들과 함께 큰 슈퍼에 들어갔다. 아마 지금의 카운트다운이나 뉴월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곳에서 선원들은 사골뼈를 눈에 띄는 대로 카트에 채웠다. 한 개에 1~2센트 정도 했다.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열을 지어 계산대 앞에 선 그들을 바라보는 키위들의 표정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
경숙에게 늘 신세만 진 선원들은 종종 마른오징어를 체면치레로 내놓았다. 그 오징어가 집에 산만큼 쌓였다. 주위에 오징어를 나누어 줄 한국인도 없었다. 경숙은 오징어를 어느 날 낙엽 태우듯이 소각했다. 얼마 안 있어 난데없이 경찰차가 들이닥쳤다. 사람 타는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오징어 타는 냄새가 꼭 사람 타는 냄새 같아 이웃이 신고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엄청 심각한 일이었다.
경숙은 결혼 다음 해인 1981년 첫아들 준호를 얻었다. 그 뒤 6년 사이 세 자식을 더 보았다. 한두 자녀도 키우기 힘든 남의 나라에서 자식 넷을 두었다는 것은 그만큼의 말 못할 고생이 따랐다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둘만 있었더라도 옷을 챙겨 선녀처럼 훨훨 하늘나라로 아니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첫아들 낳고 이름 모를 병으로 죽을 고비 넘다
“준호를 낳고 엄청 몸이 안 좋았어요. 수술을 대여섯 차례나 했는데도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의학계에도 보고가 되지 않은 알 수 없는 병이었어요. 다행히 미국에서 개발한 장비 덕분에 죽음 문턱에서 살아날 수 있었어요.”
그 뒤 경숙의 심리 상태는 극도로 불안해져 갔다. 무심한(?) 남편과 철부지 어린 자식들 사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울고 또 우는 것뿐이었다. 경숙이 던져버린 토스터만 해도 열 개가 넘는다. 그 외 살림살이는 제자리에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변경숙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나날이었다. 던지고, 때려 부수고….
어느 날 집에 완전 무장을 한 경찰 두 명이 들이닥쳤다. 남편 로이 윌슨이 아내 변경숙을 기물파손죄와 공갈협박죄로 신고한 것이다. 홧김에 한 “다 죽여 버리겠다”라는 말에 겁이 난 남편이 문화 차이로 잘 못 알아들었다. 권총을 찬 육 척 장신의 경찰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흉악한 범죄자가 아닌, 여리디여린 한 동양 여자가 울고 있었다.
8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경숙의 결혼 생활은 비교적 안정이 되어 갔다. 문화의 차이를 좁혀서가 아니라, 약간은 이해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또 기독교 신앙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뉴질랜드 한인 역사는 한인 교회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웰링턴에 최초로 한인교회가 생겼다. 그 전에 선원들을 대상으로 한 예배가 정기적으로 드려졌다. 키위들이 주축이 되어 한인들을 섬기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경숙은 매주 일요일 오후 웰링턴의 선원회관에 참석했다. 또한 키위 교회 로어핫트 CCC 교회에서도 아무 때나 한국 선원들이 입항하면 예배 모임을 가졌다.
“한국전쟁 때 군목으로 참전한 스미스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을 비롯해 많은 키위 기독교인이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저희를 도와주었어요.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초창기 한인 이민 사회에 든든한 힘이었거든요.”
돈 한 푼 안 받고 도움 필요한 곳 어디든 달려가
‘싸우면서 정든다’고 했던가. 경숙은 차츰 키위 사회에 익숙해져 갔다. 대학에서 배운 유아교육을 살려 웰링턴에서 잠시 유치원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숙의 본업(?)은 한인들의 도우미였다. 학교, 경찰서, 이민부를 쫓아다니며 한인들을 도왔다. 물론 이 일은 경숙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편 로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했다. 같은 동포로서, 아내의 동포로서 기꺼이 도운 것이었다.
“주로 선원들을 돕다 보니 행복한 일보다 가슴 아픈 일이 많았어요. 한 번은 배가 침몰해 선원의 절반이 죽는 일이 벌어졌어요. 또 기름 폭발로 전신 화상을 입어 병원에서 장기 치료를 받은 선원을 돌본 일도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이제는 흑백텔레비전의 한 프로처럼 지나간 일이지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절절하네요.”
1992년 말 변경숙과 로이 윌슨 그리고 열 살도 채 안 된 네 명의 고만고만한 자식들은 오클랜드로 올라왔다. 변경숙의 뉴질랜드 생활 2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로이의 나이 예순, 경숙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로이는 직장에서 정년퇴직했고, 경숙은 새 꿈을 안고 들떠 있었다.<다음 호에 계속>
글_프리랜서 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