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귀한 음성

손바닥소설


 

밥보다 귀한 음성

오문회 0 1479


수년 전 전라도 무주의 산촌에 살 때였다. 우리가 붙여먹던 밭은 경사가 급한 산허리에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첩첩이 산밖에 없던 해발 550고지에 놓여있는 산밭이다.

밭에서 허리 굽혀 일하다 보면, 가끔 일어나 허리를 펼 때 약간의 현기증을 일어나곤 하였다. 머릿속이 핑그르 돌면서 별 몇 개가 하얗게 눈가에서 빛을 낸다. 그 순간에 이명(耳鳴)이 들릴 때가 있다. 이명이란 나는 들리는데 남은 듣지 못하는 소리다. 비이이이 하는 소리를 들으며, 엉뚱한 생각을 하곤 했다. 어느 우주인이 나와 은밀히 교신하려고 전파를 보내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알아먹게 해달라고 딴지를 걸고 싶었다.

심수봉이 부른 유명한 노래가 있다. ‘백만송이 장미’다. 십수년 전에 그 노래가 실린 첫 앨범이 나왔을 때 “이제야 비로소 가수가 된 것 같다”고 심수봉은 썼다. 왜 그런 말을 하였을까? 고난의 세월을 그도 지고 갔던 것일까? 이승의 바람이 너무 가혹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젠 그 바람의 소리를 다시 들었다는 말일까? 그 신운(神韻)을 알게 되었다는 말일까? 예전에 황석영이 썼던 단편소설 <가객(歌客)>의 마음을 배우게 되었다는 뜻일까? 생각의 꼬리가 머무는 곳에서 가사를 들추어 본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사람에겐 자신이 태어나던 그날이 바로 태초(太初)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세상과 이 사람들과 맺는 구체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온다. 엄마와 강아지도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 태초에 ‘작은 음성’을 들었다고 이 노래에선 말한다.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의 장미를 피우고 오라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너무 가늘고 여린 음성이어서 나는 그만 무심히 넘겨버리고, 그만 잊어버리고 생애를 건너간다. 살면서 살면서 우리는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또한 상처를 주며 모래톱을 핥아대는 파도처럼 그렇게 거칠게 사랑 없이 사는데 익숙해졌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 대개는 ‘사랑은 없다.’ 솔직히 영원하다는 말은 무색(無色)하다. 언젠가 떠듬거리며 하던 말, “너를 사랑한다‘는 따위의 말은 이젠 겁 없이 하지 않는다. 세상은 슬픔의 강을 저어가는 항해이기에 외로움도 혼자 견뎌야 한다. 어차피 삶이란 그러한 것이므로.

그러나 어느날 불연듯 홀연히 한 사랑이 나를 찾아와 나를 안았다. 제 목숨마저 아낌없이 줄 것 같은 햇살같이 투명한 사랑이 내가 부르지 않아도 내가 애원하지 않아도 나를 찾아서 나를 안아 주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은총’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환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망각했던 한 소리를 다시 들었다. 모든 삶에는 사명(使命) 있다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의 장미를 피우고 오라는 천명(天命)이 있음을 다시 듣게 되었다. 

그는 말한다, 무심히 듣지 말라고. 부산한 언어 한가운데 그분의 음성도 섞여 있을 것이므로.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는 날, 슬픔의 강은 더 이상 네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유롭게 사랑하라고, 아무리 주어도 마르지 않을 자비의 샘을 이미 그대 가슴 속에 숨겨두었음을 알았으므로. 돌아올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도 우리는 희망 없이도 사랑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광야에서 예수가 악마에게 받은 첫 번째 유혹은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라는 것이었다. 사십 밤낮을 단식하셨던 예수는 굶주림을 넘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듣고 싶다.” 태초부터 나를 갈망해 오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입에 넣어주신 하느님의 말씀에 기대어 예수는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다. 내 밥을 구하는 것보다 더 귀한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

저자 한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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