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13편]; 미쳤지

손바닥소설


 

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13편]; 미쳤지

일요시사 0 1511

이런 시간도 필요하지. 나이 들어 자칫하면 혼자 칩거하기 마련인데. 

서로 만나 마누라가 못 해주는 말도 서슴없이 해준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고 보면 친구는 거울 같은 존재인지도 몰라. 나와 마누라가 못 보는 부분을 비춰주니까. 

그래, 진작부터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면 좋았을 거야.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방향 잡아가도록 얘기해 줄 수 있는 것도 고맙지. 

그런 의미에서 또 한잔, 건배!


 

“어서 와. 나도 방금 도착했어.”

 

“반갑구먼. 이렇게라도 보니.”

 

먼저 온 K가 일어나 막 들어오는 L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추석날 저녁, 노스코트의 교민식당은 한산한 분위기였다. 아내가 한국에 치아 치료 차 떠나서 혼자 있는 L을 위해 K가 자리를 마련한 거였다. K는 3년 전에 아내를 여의고 혼자 살고 있던 터라 혼자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오랫동안 외국 나와 맞이한 추석이라 덤덤했다. K와 L은 육십 중반 나이에 가족이 못 해주는 일을 서로 챙겨주는 사이였다. 둘 사이에서 끓는 대구탕 냄비가 딸깍딸깍 들썩거렸다. 한가위 고향 집 음식 냄새를 대신 맡으며 위안으로 삼았다. 맵고 뜨끈한 대구탕 국물에 속이 확 녹았다. 저녁 기운이 으스스한데 딱 맞는 음식이었다. 대구탕 냄비를 가운데 두고 소주 한 잔씩을 기울였다.

 

“아내가 한국에 간지 한달 쯤 됐나? 챙겨놓고 간 반찬도 거의 떨어졌겠구먼”

 

“어찌 그리 잘 아는가? 이제 좀 허전하구먼. 오랫동안 혼자 사는 K, 자네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

 

빈 잔에 술을 따라 다시 한번 짠하고 건배를 했다. L이 흘끔 K의 안개 서린 안경을 다시금 살폈다. ‘눈물기인가 대구탕 김 서림인가. 소주 두 잔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걸 보니 몸이 좀 부실해졌나?’ 대구 가운데 토막을 국자로 떠서 K의 앞 접시에 담았다.

 

“K, 자네 속이 좀 허한 게 아니야? 건더기 좀 푹푹 떠서 들어. 나이 들며 먹는 것이라도 잘 들어야지. 특히나 혼자 살게 되어서 본인이 안 챙기면 누가 챙겨주겠어?”

 

“고맙구먼 L! 명절 때가 오면 마음이 좀 약해 지나 봐. 아내 살아있을 때만 해도 아들딸 가족과 잘 만나 식사도 하고 여행도 다녔는데. 요즘은 웰링턴에 사는 아들도 사업이 힘든지 잘 못 보네. 딸애는 영국에 새 직장을 잡아 간 사위랑 그리로 가고 나니 좀 그렇지. 혼자 사는 홀로서기에 나름의 방법을 찾아 적응하는 중이야.”

 

“이번 추석, 아내는 서울 간 김에 딸내미 집에서 쇠면서 치아 치료도 받으니까 괜찮은데. 오랜만에 명절에 나 혼자네그려. 어쨌든 나이 들면서는 건강을 잘 챙기는 게 제일 순위가 아니겠어? 지난달 P 좀 보라고. 심장에 이상이 생기며 쓰러졌잖아. 콜레스트롤 수치도 높고 당뇨 합병증도 악화되더니 결국 먼저 먼저 세상 떠나갔잖아. 나이래야 겨우 육십 초반이었는데. 과로도 무시 못 하지. 세븐데이로 거의 쉬지 못했으니. 그놈의 돈이 무엇인지… .”

 

“그 소리는 P가 들을 게 아니고 내가 들을 이야기지.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뜬 게 다 그 일 때문 아닌가? 이민 와서 부부가 함께 자영업 하며 보낸 세월이 15년인데. 나야 성격이 느긋해서 오늘 못하면 내일 하는 식이잖아. 아내는 정반대였어. 그 날 일은 밤이 새도 마치고 잤거든. 거의 완벽주의였지. 그럼 뭐 하겠나? 돈은 좀 벌었다지만, 정작 본인이 떠나가 버렸으니. 그땐, 우리가 미쳤던 거야. 미쳤지. 일과 돈과 성취에 미쳤지. 정작 미칠 것은 몸과 마음의 건강관리였는데, 실기한 게지.”

 

“이런 시간도 필요하지. 나이 들어 자칫하면 혼자 칩거하기 마련인데. 서로 만나 마누라가 못해주는 말도 서슴없이 해준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고 보면 친구는 거울 같은 존재인지도 몰라. 나와 마누라가 못 보는 부분을 비춰주니까. 그래, 진작부터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면 좋았을 거야.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방향 잡아가도록 얘기해 줄 수 있는 것도 고맙지. 그런 의미에서 또 한잔, 건배!”

 

“맞아. 중요한 것에 제대로 미쳤어야 했어. 나라고 뭐 잘한 것도 없지. 나도 자영업 해서 처음엔 자리를 잡나 싶었잖아. 그때, 웬 감투에 미쳤는지 몰라. 교민 단체 회장 한 번 해보겠다고 정신이 쏙 빠졌지. 말 그대로 그땐 정말 미쳤지. 어찌어찌해서 어렵사리 회장에 당선은 되었지. 그다음 임기 2년 하고 나서 죽는 줄 알았네. 명예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해보고 나니 별로 남는 게 없더구먼. 차라리 그때, 아내가 좋아하는 세상 유적지 여행이라도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회장 일 마치며 깊이 되뇌었지. 성경에서 세상이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누리고서 솔로몬이 외친 말, ‘헛되고 헛되도다’가 저절로 나오더구먼.”

 

L이 머리를 끄덕였다. L도 교민 교회에서 큰 직책을 두루두루 맡아가며 봉사하면서 많이 깨쳤던 게 생각났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었나 자문해보았다. 자기가 좋아서 예수를 업고 허세를 부린 건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 보기 좋게 행세했다면 보여주기 신앙이 아닌가? 신앙에도 바르게 미치면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을까, 간혹 바리사이파처럼 미치니 문제였다. L의 공감 반응에 K가 말을 더 보탰다.

 

“그래 맞아. 사람들은 어느 순간, 딱 미치지. 정말 좋은 일에 미치면 누가 뭐라나. 간혹 번지수를 잘못 짚어서 문제지. 균형을 잃으면 꼭 문제가 생기잖아. 우리네 인생길에 시도 때도 없이 급커브와 낭떠러지가 나타나는걸. 현실과 이상의 균형감각이 있으면서 속도 조절이 되면 좋은데. 무대포로 질주하다 보면 급커브에서 휘청거리며 제어할 수 없는 관성 때문에 길에서 이탈하여 전복되고 말잖아.” 

 

“자동차만 속도 조절과 방향 선정이 중요한 건 아니지. 사람이 가는 길, 인생길에 방향설정이야말로 가장 필수가 아닌가, 그다음에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고. 이민 생활에서 보면 여러 예가 여실히 나타났잖아. 고국에서 새로운 나라에 발을 들여놓을 때야 얼마나 신중했나. 부부 사랑과 가정 행복을 기치로 삼고 정착하면서는 참 좋았지. 시간이 지나면서 초심이 퇴색되는 줄도 모르고, 개인의 욕망이 지나치다가 결국 제대로 가야 할 길에서 이탈된 경우들. 예외 없이 돌출되는 급커브에서 제어 힘을 잃은 자들. 일에 너무 빠지다가 자기 몸이 병든 줄도 모르고 쓰러지는 일. 가정보다 자기감정에 쏠려 다른 이성에 눈멀어 불륜으로 가정 파탄 한 일. 세금 줄이려다가 절세를 넘어 탈세로 급기야 세금 폭탄 맞고 부도난 일. 모임에서 자기 주장 너무 내세우다 자기만 남겨두고 사람들이 자기 주변을 떠나 혼자 동그마니 남은 자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인 것 같네. 왜 우리 나이도 좀 들었지 않은가. 골드카드받는 나이가 되면 국가에서 왜 연금을 주겠어. 서서히 쉬면서 자기 몸 챙기며 살라는 당부이지.”

 

“그려그려. 어서 남은 음식과 술을 비우자고.”

 

“난 요즘 고국의 대통령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물씬 드네. 제대로 국민과 나라를 위해 일하면 얼마나 좋겠어. 사리사욕에 미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지나치게 쏠린 나머지 결국은 급커브에서 전복하여 철창 낭떠러지로 추락한 사고들. 자기 몸만 다치는 게 아니고 나라 전체가 휘청거려 문제지. 세계 사람들한테 참 부끄럽기도 하고.”

 

“대통령 주변에 거울 같은 가신들이 없어서 문제야. 자 마저 들고 나가세. 술이 좀 올랐으니 바깥바람도 쐬며 걷자고. 자네 집이 가까우니 먼저 그리로 가세. 내가 자넬 데려다주겠네. 난 자네보다 술을 덜 마셔 상태가 나으니까.”

 

“뭐 그럴 게 있어. 내친김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가게나. 블루베리 술, 보물단지 하나 묻어놨거든. 그거 풀어서 마시자고. 아무도 없는데 부담 없잖아. 이럴 때 하얀 밤을 새워보는 게지.”

 

“거참 좋은 제안이네. 그러더라고. 아침 늦게까지 푹 자고. 글렌필드 수영장, 사우나가면 딱 좋겠네.”

 

“우리가 지금 뭐 하는가?”

 

“미쳤지. 제대로 미쳤어.”

 

“우리 자신을 위하여 오랜만에 미쳤지.”

 

대구탕 냄비 속에 남은 국물을 떠먹으며 K가 자기 술잔에 남은 술을 따랐다. L이 술병을 받아서 마저 따라 주었다. 술병도 비고 음식도 거의 다 바닥이 났다. 그 정도면 딱 좋다는 생각이 두 사람 마음에 들었는지,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K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 시루에서 갓 쪄낸 백설기 떡판이 밤하늘에 걸려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름달이었다. 보름 달빛이 하얗게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

 

 

LYNN: 소설가. 오클랜드 거주.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