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소설

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17편]; 서쪽으로 간 까닭

일요시사 0 535

얼마나 많은 이가 밟고 지나갔을까? 

바닷물의 밀물 썰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추억이 남은 곳. 

살다 보면 잊고 싶을 만큼 진저리친 기억도 있다. 

가끔 되뇌어보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도 있다. K가 서쪽으로 간 까닭, 

그 추억을 만나고파 발길 닿은 곳. 피하에 저녁노을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온 세상을 품어주고 토닥거려주는 그리움이 물들어갔다. 

K는 가만히 서서 그 노을에 푹 빠졌다.

 

 

늦은 봄기운이 나른하게 밀려오는 오후. K는 홀로 오클랜드를 떠나 서쪽으로 길을 나섰다. 스완슨 지역을 벗어나자 삼림 길이 이어졌다. 시닉 드라이브를 거쳐 피하로드로 접어들었다. 타스마니아 서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꼭대기에 차를 세웠다. 사자바위를 끼고 피하바다가 한눈에 쫙 들어왔다. 검푸른 바다 위에 하얀 파도가 밀려왔다. 한참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K를 오클랜드 북서쪽 피하로 치닫게 한 힘도 파도에 스러졌다. 회사에서 비번인 오늘, 오전에는 집 밖의 무성한 잔디를 깎았다. 웃자란 더벅머리를 이발한 개운함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신선하고 깊은 잔디 생 내음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서쪽으로 간 크리스가 불현듯 보고 싶었다. 훌쩍 떠난 발걸음의 연유였다.

 

***

 

이민 초기, K가 정착한 집 옆에 크리스가 살았다. 크리스는 건장한 체격의 마오리였다. 그의 아내는 뉴질랜드 현지인, 키위였다. 두 딸은 엄마를 닮아 금발 머리를 가졌다. 주말만 되면 크리스는 가족을 데리고 피하로 서핑하러 다녔다. 빨랫줄에는 그의 가족이 입었던 수영복과 서핑용 옷들이 널려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옷들이 햇살에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활달하고 밝은 크리스 가족의 건강미가 느껴졌다. 바닷가 휴양지에 놀러 온 가족 같았다.

 

어느 날 서핑 다녀오는 크리스에게 K가 물어보았다. 

 

"주말만 되면 서쪽으로 서핑 가는 당신 가족이 부럽다. 뭐가 그리 좋으냐?"

 

"주중에는 맡은 바 일에 매진하지. 주말이면 서쪽바다, 피하가 우리 가족을 부르거든. 그 맛에 길들면 못 말려. K도 길들여지면 나랑 똑같아질걸. 시간 되면 함께 가지."

 

그런 대화가 오고 간 후, 다음 주말. 크리스 가족을 따라 K가족도 피하에 함께 갔다. 크리스는 여분의 서핑 보드를 가져와서 K가족에게 하나씩 안겼다. 서핑보드 타는 법을 시범으로 보여주면서 손수 지도해줬다. K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하는 가족을 보면서 K도 흐뭇했다. 이웃을 잘 만나 즐겁게 지내는 게 고마웠다. 

 

K는 크리스로부터 배운 대로 서핑보드를 탔다. 밀려오고 멀어져 가는 파도에 몸을 실어 보드에 빠졌다. 재미가 더해가면서 더 센 파도를 즐기려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휩쓸리는 강한 파도에 바다 깊숙이까지 들어갔다. 밖으로 나오려는데 영 말을 듣지 않았다. 거꾸로 몰아친 거센 바람이 보드를 바닷속으로 밀어 넣었다. 서너 번을 시도하다가 기진맥진해졌다. 서핑보드에 엎드려 안간힘을 썼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한 손을 들어 S.O.S를 외쳤다. 세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피하는 몇 년 전 한국 사람들이 낚시하다 돌풍에 휩쓸려 바다로 빠져 유명을 달리한 곳이기도 했다. 그 악몽의 뉴스들이 험악한 파도를 타고 K를 강타했다. 망망대해~ 바닷가에 서 있는 가족이 가물가물해졌다. 갈 데까지 가고 만 것인가~

 

얼마쯤 지났을까? K는 자신의 목을 낚아채는 충격에 아찔했다. 정신이 몽롱했다. 목은 더 꽉 조여왔다. K의 몸이 끌려갔다. 파도를 거슬러 바깥으로 나갔다. 바닷가 모래 위로 간신히 옮겨졌다. 갑자기 K의 몸을 뒤집는 억척 손에 의해 배를 모래에 대고 엎어졌다. 순간, 목구멍으로 큰 손가락이 치밀고 들어왔다. 물을 토했다. 등을 누르는 압박이 가해졌다. 먹었던 물이 계속 입 밖으로 토해졌다. 얼굴에 물이 끼얹어졌다. K가 눈을 떴다. 주변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곁에서 무릎을 꿇은 이가 있었다. 크리스였다. 크리스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크리스의 강한 팔뚝이 꿈틀댔다. 팔 안쪽에 붉은 자극이 눈에 띄었다. K는 크리스의 손을 꼭 쥐었다. K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다 낚시하다 거센 파도에 휩쓸려간 혼령들이 도왔을까? 그네들처럼 악몽이 되풀이되진 않았다. 

 

K가 궁금해하는 게 있었다. 크리스는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운동 트레이너인지, 피트니스 센터에 나가고 있다는 정도만 알았다. K가 쉬는 날, 우연히 크리스를 따라 그의 일터로 향했다. 피트니스 센터에 들어서며 화들짝 놀랐다. 직원들이 업무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비로소 알았다. 크리스는 그 운동 헬스클럽의 직원이 아니라 오너였다. 크리스가 대표, 사장이란 걸 이야기 안 해서 그동안 직원으로 생각했다. K는 자신의 속단이 부끄러웠다. K가 크리스 입장에 있었다면 은연중에 자신의 위치를 이야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신이 자존 감으로 가득 차 있으면 남의 이목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법인데. 벽에 걸려있는 사업자 등록증 액자에 인쇄돼있는 오너 크리스 이름이 빛나 보였다. 굳이 내 입으로 이야기 하지않아도 내 위치가 바뀌는 게 아닌데. K는 동쪽으로 간 상태도 아니면서, 서쪽으로 간 크리스를 알기엔 턱 부족이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남에게 알려지기를 힘쓰지 않아도 될 터였다. 보살이 따로 없었다. 크리스 마음이 부자라는 사실에 무한 신뢰가 느껴졌다.  

 

뜨거운 여름날, 주말을 맞아 K가 앞뜰 잔디를 깎았다. 잔디를 깎은 뒤 초대받은 집에 방문할 요량으로 좀 서둘렀다. 두 시간가량은 깎아야 할 면적이었다. 경사도 진 터라 힘이 들었다. 한 시간가랑 땀 흘려 반쯤 깎은 시간. 웬걸, 잔디깎이가 작동을 멈춰버렸다. 이리저리 뜯어서 닦아내고 조여봐도 소용이 없었다. 약속 시간은 다 돼갔다. 잔디깎이를 한쪽에 세워두었다. 초대받은 집에 가족과 함께 떠났다. 저녁 식사를 잘 마치고 곧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는데 앞뜰이 훤했다. 깎다 말고 떠난 잔디가 깔끔하게 깎여있었다. 잔디깎이도 잘 닦여 차고 앞에 세워진 채였다. K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도 신기해했다. 누가 그렇게 했을까? 모두 어리둥절했다. 고마운 손길이었다. 우렁이각시가 다녀간 걸까? 크리스의 집 앞뜰도 깨끗하게 단장돼 있었다. 분명했다. 크리스의 선행이었다. 빨랫줄에는 수영복과 서핑복이 널려있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크리스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특별한 달란트를 가진 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가 K의 집 문을 두드렸다. 곧 이사를 한다고 했다.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까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결국 그리로 가는구나. 섭섭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음날 K 아내는 한국식으로 저녁 식사를 차렸다. 크리스 가족을 초대했다. 함께 식사하며 그동안 고마움을 나눴다. 진실하고 인간적인 향기가 풍기고, 가을 서사가 배인 사람, 크리스는 그렇게 떠났다. 함께 있을 때 잘하는 사람, 따로 떨어져있을 때 기억나는 사람. 크리스가 그랬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에 크리스가 왜 생각날까.

 

***

 

K의 발걸음이 피하 바닷가로 향했다. 어림잡아 딱 그 지점에 멈췄다. 십수 년 전, 서핑보드 타다가 구조를 요청하여 K 몸이 옮겨지던 순간이 생각났다. 크리스가 억센 팔로 목을 껴안고 바깥으로 헤엄쳐 나왔던 곳. 안전사고 응급조치가 취해졌던 곳. 얼마나 많은 이가 밟고 지나갔을까? 바닷물의 밀물 썰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추억이 남은 곳. 살다 보면 잊고 싶을 만큼 진저리친 기억도 있다. 가끔 되뇌어보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도 있다. K가 서쪽으로 간 까닭, 그 추억을 만나고파 발길 닿은 곳. 피하에 저녁노을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온 세상을 품어주고 토닥거려주는 그리움이 물들어갔다. K는 가만히 서서 그 노을에 푹 빠졌다.

 

카프카의 마지막 일기 한 줄이 떠올랐다.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

K는 내일 아침이면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할 것이다. 시내방향 오네와로드로 내려오며 선글라스를 쓸 터. 하루의 일상. 대면하는 사람들. 스쳐가는 생각… . 일 마치는 늦은 오후쯤이면 서쪽으로 물들어가는 석양을 바라볼 것이다. 

 

 

 

LYNN: 소설가. 오클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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