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20편] 산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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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20편] 산채로

일요시사 0 1944

정겹기 그지없네그려. 나그네 발길 멈추게 하는구먼. 산채 들라네. 

아니, 산채로 드시라고.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다 만난 곳. 산속 주막, 아니 산장가든에 들어섰다.

기와집 음식점 간판 이름이 ‘산채로 들어요’다.

뭘 산채로 들으라는 걸까? 호기심도 일고 궁금하기도 했다. 

식당 안 주인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방 안쪽 자리에 방석을 깔아주며 안내했다.

 

 

“무슨 소리인가 했어. 미소를 자아내는 지리산 속 식당 이름. 정겹기 그지없네그려. 나그네 발길 멈추게 하는구먼. 산채 들라네. 아니, 산채로 드시라고.”

 

“요즈음은 지리산 산골에도 여유와 위트가 배어들었어. 출출할 텐데, 신선하고 맛깔 넘치는 토속음식 들고 가래. 그것도 산채 드시라니. 그려, 우리 산채로 들고 가세.”

 

U 부부와 E 부부가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다 만난 곳. 산속 주막, 아니 산장가든에 들어섰다. 기와집 음식점 간판 이름이 ‘산채로 들어요’다. 뭘 산채로 들으라는 걸까? 호기심도 일고 궁금하기도 했다. 식당 안 주인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방 안쪽 자리에 방석을 깔아주며 안내했다. 

 

“야~ 오늘 지리산 등반, 참 인상적이네. 가을 단풍도 울긋불긋. 하늘은 높고 맑으니 딱 우리 날인 듯했어. 남원에서 정령치까지 가서. 정령치부터 만복대, 성삼재에 이르는 산길 등반. 1,438미터의 만복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봉우리들! 가슴이 뻥 뚫렸네. 말로만 지리산 했는데 이렇게 맛보기 식으로라도 걸으니 참 좋았네.” 

 

“그러게. 맨날 날씨가 좋은 게 아니거든. 자네 부부가 멀리 뉴질랜드에서 왔다니까 지리산 산신령이 그리 도운 게 아니겠어?”

 

“이렇게 함께 하기도 쉽지 않은데, 고국 자연경관에 흠뻑 젖게 돼서 그만이구먼. 어쨌든 고맙지. 이런 좋은 곳에 구경 안내도 시켜주니까.”

 

“우리도 올 가을걷이 하느라 무척 바빴는데. 딱 큰일 끝내고 나서 자네 부부가 와 줘서 이렇게 시간을 하니 우리가 오히려 고맙지.”

 

U와 E는 초, 중, 고등학교를 함께한 고향 친구라 막역한 사이였다. 아내들도 고향 출신이라 넷이 만나오면서 정이 듬뿍 들었다. U 부부는 줄곧 고향, 남원 땅을 지켜왔다. E 부부는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하다 뉴질랜드에 이민을 갔다.

 

“U, 자네 아들 결혼을 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하네. 얼마나 잘 됐는가. 농장에서 보니 건실하고 든든해 보였어.”

 

“E, 자네 딸은 외국에서 좋은 직장을 가졌으니 정말 좋겠어. 요즘 고국은 좋은 학벌에도 취업이 안 돼. 뭐랬더라, 국제 변호사라고 했지. 탄탄한 전문직이라 걱정 없겠네.”

 

“U, 모르는 소리야. 서른 중반 나이인데도 결혼 생각이 없어. 단 하나뿐인 딸아이라 기대도 많았는데. 혼사에 신경 쓰는 부모 마음이 잘못됐나, 원 자꾸 묻기도 부담돼. 요즘은 시티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아. 아내와 나 둘이라 집이 빈 것 같아”

 

“E, 우리 아들놈도 혼자 아닌가. 속깨나 썩였지. 대학 졸업 후 서울서 어렵사리 직장을 잡아서 좋아했는데. 일 년도 못 하고 때려치운 거야. 사업한다고. 경험도 없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좀 지원해 준 거 다 까먹더구먼. 방황하다 자살 직전까지 갔지. 그런 꼴도 못 보겠데.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더니 스페인 산티아고를 간대. 사람이 살고 볼 일이라 눈 딱 감고 비용 마련해 보내줬지. 다녀온 뒤, 고향 내려와 귀농한 게지. 처음엔 주변 이웃 시선이 얼마나 따가웠는지.” 

 

E가 U의 이야기에 아내들도 거들어가며 자녀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자식 농사야 마음대로 안 되는 거라고 선배들이 이야기할 땐 흘려버렸는데. 세대 차이를 떠나 젊은이들은 가치관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U와 E가 살아온 전통적 가부장 사회의 잣대에서 아무리 양보를 해도 이해 못 할 게 천지다. 

 

“U, 사람은 열 번 바뀐다는 말에 실감이 가네. 자네 아들일 만 봐도 매우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네. 도회지 직장이 다가 아닌 세상이야. 고국도 외국도 마찬가지지. 정말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에 몰입하는 것. 비록 지금은 남 보기에 근사하지 않아도 돼. 내가 좋아 폭 빠져 일하면서 생계가 해결된다면. 그리고 점차 나아진다면. 그런 일은 적극적으로 권장할 만하지.”

 

“E, 자네가 내 아픈 마음에 제대로 치유 말씀을 해주는구먼. 아, 참 자네도 아내랑 산티아고 순례길 다녀왔다고 했지. 그곳이 그렇게 좋은가. 아들이 확 바뀌었거든. 예전엔 남의 시선에 힘들어했는데. 요즘은 농장 일에 재미를 붙이더니만, 밤에도 책보고 인터넷 보고 해서 내가 모르는 방법을 찾아다 적용해보더구먼.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귀농한 이들의 카페나 블로그에도 계속 접속하나 봐. 가끔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하고. 이 녀석이 와서 두 해가 됐는데, 농사일과 과수 농원 그리고 축산 농장만 해도 몇 가지가 바뀌었어. 과수 농원과 농기계 관리도 많이 개선됐지. 왜, 소 키우는 축사 있잖은가. 나도 선진화된 방식으로 지었다고 했는데, 이 녀석이 약간 보완을 하더구먼. 요즘 한우 가격이 엄청 상한가야. 큰 소는 천만 원쯤 해. 송아지가 삼, 사백만 원씩하고. 예전에는 한 해에 송아지들이 한두 마리씩 죽기도 했어. 아들 녀석이 축사를 바꾼 뒤로는 한 마리도 실족하지 않았어.”

 

“우 와~ 대단하네. 자네 농장 소가 이백여 마리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부자가 따로 없네. 그건 그렇고 자네 아들 눈을 보고 판단했잖아. 건실하고 든든해 보였다고. 게다가 산티아고를 혼자 다녀왔다면 말 다 했지. 요즘 세상에선 경험 없는 자들의 조언은 독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도 뉴질랜드에서 생업으로 십수 년 해왔던 빨래방 일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지. 왠지 아나? 일만 해서 돈은 모았지만 결국 몸과 마음이 탈 난 거야. 오랫동안 모텔사업에 24시간 매달려 일해온 선배가 있었어. 나중에 쓰러지더구먼. 몸 건강을 회복한 뒤로 일년을 자신들의 안식년으로 정하더라고. 종업원에게 다 맡기고. 그리고 간 곳이 바로 산티아고였어, 완전히 생활 패턴이 달라지더구먼. 그 선배의 충언을 받고 나도 아내와 산티아고를 다녀온 거야. 역시 선배 말이 맞았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대. 산티아고를 다녀온 사람과 다녀오지 않은 사람. 딸 아이도 이번 여름 휴가 한 달간 산티아고에 다녀온다고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구먼. 아내가 산티아고 가보라고 딸아이에게 꽤 공을 들였나 봐.”

 

“나도 그러면 가봐야겠네. 여보 우리도 내 년쯤에 산티아고 가봅시다그려. 사실 우리 며느리도 아들 녀석이 산티아고 한 달간 걸으며 만난 아가씨였대. 혼자서도 그 길을 걷겠다고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걸 보면 야무지단 생각이 들어.”

 

참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와의 대화가 감나무 홍시처럼 빨갛게 무르익어갔다. 큰 상위에 서른 가지쯤 되는 반찬이 올라왔다. 다 산채로다. 뉴질랜드 살다 온 E 부부는 눈빛이 휘둥그레졌다. 외국에서 단출하게 먹다가 고향 와서 상다리가 휠 것 같은 큰 밥상을 받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산채 나물밥에 백반 정식이라, 그래서 ‘산채 들어요’라고 했나 싶구먼.”

 

“E, 자 한잔 받게. 지리산 더덕주라 향이 좋아. 보약이거든. 자, 가득~ 저기 제수씨도 한 잔 받아요. 장수에도 좋고 미용에도 좋답니다.”

 

이어서 E가 U의 조그마한 도자기 술잔에 가득 부었다. 역시 U의 아내 잔에도 조심스레 따랐다.

 

 

“자, 우리 모두 건배! 우정을 위하여, 산채로!”

 

“들어요!”

 

‘산채로’ 선창에 즉각 튀어나온 ‘들어요’ 답 창이 우렁찼다. 산채나물, 더덕, 두릅, 도라지, 미나리, 우엉, 돋나물, 꼬막, 게장, 굴비, 간고등어, 파전, 홍어회, 청국장, 순두부… . 모두 산채로였다. 싱싱하고 신선도 높은 음식이라니. 지리산을 몇 시간 걷고서 출출한 터에 먹는 점심이라 입에서 살살 녹았다. 씹어 삼키는 그대로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듯했다. 온몸에 산채로 퍼져 활력을 쏟아낼 에너지로 저장되었다. 후식으로 입가심하는 누룽지탕은 옛 외할머니 맛 솜씨였다. 산채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U, 이번 고국 방문이 남달리 남을 것 같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를 뵈었지. 거동이 불편하셨어. 누워계신 두 분 가슴에 번갈아 얼굴을 잠깐 묻었지. 언제 다시 또 오나. 가슴 뭉클한 감정에 젖어 그만 눈물이 날 뻔했다네.”

 

“E, 부모님께서도 흡족해하셨을 것 같네. 틀니가 맞지 않아 자네가 두 분 입에 맞게 새로 해드렸다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해하실 것 같네. 살아생전에 멀리서 이렇게 와서 함께 해드렸으니.”

 

E가 톡 터질 것 같은 싱싱한 왕 포도를 입에 넣었다. 한 알, 두 알, 세 알, 네 알. 양쪽 볼이 볼록했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 알사탕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볼이 생각나서였을까. 좀 차분해진 분위기가 희석되었다. E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슬퍼 보였다. U 부부와 E 아내가 깔깔대고 웃었다. E가 왕 포도를 산채로 깨물었다. 청포도 눈물이 시큼하니 찔끔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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