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들,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다. 1. '할 수 있을까, 해 낼 수 있을까'

손바닥소설

개척자들,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다. 1. '할 수 있을까, 해 낼 수 있을까'

일요시사 0 2045

일요시사는 700호를 기념하여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실으려 한다. 

 

50여 년 뉴질랜드 이민 역사의 초창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먼저 살았던 사람의 삶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 마련이다. 

 

그 삶이 위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시대를 살아온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그 시대를 되돌아보는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들의 관심과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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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뒤돌아보면, 어떤 일이든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유독 나 혼자만의 경우일까. 지난날의 기억은 세월에 가라앉아 평평해졌는데, 앞을 보며 살아왔다고 여겨왔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왜이며, 화려한 것이든 초라한 것이든 지난날의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을 왜일까. 

어떤 목적을 위해서, 어떤 목표를 바라고 살아왔던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행복했던가. 만족스러운 인생이었던가.

지난날들 속에 들어있는 많은 일들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기억들의 무게를 고르게 나누어 놓는다. 그 작업을 마쳤을 때, 내 삶은 촘촘해졌다. 지난날들의 기억들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1. 웰링턴으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하루 빨리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클랜드 공항을 떠난 국내선 비행기는 짙은 녹색의 완만한 대지와 은박지를 잘게 구겼다가 펴놓은 듯한 주름진 바다를 넘나들며 남쪽으로 곧장 날아갔다. 적도 반대편에 있어서일까,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내려다보이는 산과 바다는 한국의 아기자기한 산천과 달랐고, 베트남의 울창한 밀림과도 달랐다. 아기자기하기보다는 선이 굵었고, 울창하다기에는 온순하고 평화로웠다.

한 시간 후,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었다. 청년 박태양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푸른 숲 사이로 하얀 집들이 점처럼 박혀 있었고, 묵직한 산그늘에 활주로가 펼쳐져 있었다.

창밖은 황량했다. 크고 작은 비행기와 건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활주로 저편의 격납고로 보이는 건물과 소박한 관제탑이 창밖으로 보이는 시설의 전부였다.

이런 곳이 수도인 웰링턴의 공항일 리가 없어.

착륙을 마친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그리고 승객들이 출입문을 향해 걸어 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중간기착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승객들이 거의 빠져나갈 때까지 좌석에 버티고 앉아 있는 동양 청년에게 승무원이 다가왔다.

무엇을 도와줄까요?

승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는 웰링턴까지 갑니다.

여기가 웰링턴입니다.

박태양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의 풍경은 박태양이 상상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가? 저곳이?

베트남에서 군 복무를 마친 박태양은 한국 외교관으로서는 최초로 뉴질랜드에 파견된 아버지의 임지이면서,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웰링턴으로 가는 길이었다. 

제대를 기다리면서 박태양이 알아본 뉴질랜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선진국들의 하나였다. 부모와 형제를 만난다는 설렘과 선진국을 보게 된다는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박태양은 비행기에서 내렸다.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의 땅을 밟았다. 고개를 숙여 땅을 밟고 있는 두 발을 확인했다. 고개를 들어 병풍처럼 서 있는 검은 산을 올려다보았고, 산자락과 이어져 있는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박한 공항의 소박한 건물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그리 황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평생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972년이었다.

 

한국전쟁에 전투병력을 파견했던 뉴질랜드와 한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왔다. 1962년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고, 한국의 대통령이 방문한 후인 1971년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에 대한민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아버지 박영은 초대 대리대사로서 부임했고, 대사관 개설 후 초창기의 업무를 수행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공관을 나섰고, 저녁 늦게 관저에서 돌아왔다. 아버지가 대사관으로 출근하면 박태양은 웰링턴 시내를 돌아다녔다. 오래된 석조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사진으로 보아온 잘 사는 나라의 대도시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건물들은 답답할 정도로 단정했고, 거리는 금방 청소를 한 것처럼 깨끗했다. 그런 거리를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이 오고 갔다. 사람들의 표정과 옷차림은 현실적이면서 실용적이었고, 검소했다.

박태양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다. 공관에 거의 다 왔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의 건물이나 도로가 낯설었다. 길을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새 식민지풍의 고풍스러운 건물과 오래된 블록이 깔려 있는 보도 중간에 서 있었다. 거리에는 한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동양인을 찾기도 어려웠다. 아무리 둘러봐도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저만치 백인남자가 걸어왔다. 평범한 차림의 청년이었다. 학생 같기도 하고 회사원 같기도 했다. 박태양은 남자 앞으로 다가섰다. 걸음을 멈춘 남자에게 관저의 주소를 대며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주소를 확인한 남자가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남자는 오던 길을 되돌아서 앞장서 갔다. 10여 분을 걸어서 공관에 다다랐다. 남자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 되돌아갔다.

박태양은 자신이 가던 걸음을 되돌려서 길 잃은 동양인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단순한 친절이 아닌, 곤란에 처한 사람을 향한 배려라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낯선 사람들이 낯설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에게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박태양이 모르는 그들의 질서와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안정이 느껴졌다. 재미는 없지만 편안했다. 그러자 마음이 놓였다. 

며칠 후 아버지가 박태양을 대사관저로 불렀다. 대사관저와 공관은 걸어서 20여 분 거리에 있었다. 박태양은 공관에서 대사관까지 걸어갔다.

집무실의 커다란 창문을 등진 아버지가 두꺼운 서류를 읽고 있었다. 잠시 기다렸다. 책상 위에 두 손을 모은 아버지가 박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공부를 하거라.

아버지가 말하는 공부가 어떤 것인지 박태양은 알고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근무하면서 선진국들을 보아온 아버지는 한국과 선진국과의 격차를 늘 안타까워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하루 빨리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선진국에서 새로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뉴질랜드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군 복무를 마치면 아마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겨왔던 말이었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서 하는 아버지의 말에는 언제나 거역하지 못할 무게가 실려 있다는 것을, 박태양은 알고 있었다. 그날따라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던 박태양이었다. 모든 것이 생소한 환경이었다.

할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

오래 전 중학교 일학년 때, 프랑스 파리에서 일 년 동안 중학교에 다닌 적이 있긴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여서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박태양은 느끼고 있었다.

장래를 생각해야 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해야 할 시기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머릿속은 복잡한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꾸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편지마다 건강하게 돌아와서 결혼하자던 그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현관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만히 박태양의 표정을 살폈다. 박태양은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있었는지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박태양을, 다 큰 자식을 안아주었다.

어머니에게 안겨서 박태양은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영어가 중요했다. 박태양은 자신이 정작 두려워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영어공부를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 콜롬보 플랜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간단히 말해서, 영연방 국가들이 영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고 있는 개발도상국가의 영어 교사들을 초빙하여 일 년에 걸쳐서 연수를 시키는 과정이지요. 물론 체류비와 교육비용을 전액 지원하면서요. 매년 십여 명 정도의 한국인 교사들이 영어를 배우고 있었어요. 

 

박태양은 선생님들 틈에 끼어서 영어를 배웠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의 수업이었고, 모든 수업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첫 장부터 전부 영어로 쓰인 교재를 읽고, 영어로 말하는 교수의 설명을 듣고,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의견을 발표하고, 매일 과제를 작성해야 했다. 한국에서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영어가 아니었다. 대학입시를 위한 성문종합영어식 사지선다형의 영어는 더더욱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서 학교에서 보낸 시간만큼 다시 복습을 했고, 다음날 수업할 내용에 대해 예습을 했다. 박태양은 우수한 성적으로 과정을 마쳤다.

 

이듬해, 박태양은 빅토리아대학(University of Victoria)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스물다섯 살에 다시 신입생이 된 것이었다. 당시 대학생의 학비는 전액 국가에서 지원했다. 학생은 일종의 학생회비로 일 년에 125달러만 부담하면 되었다. 부럽기만 한 선진국의 교육이었다.

대학교의 공부는 어려웠다. 교수의 강의도 어렵지만, 강의를 듣기 위한 준비가 많았고 범위가 넓었다.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교재를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고, 교수의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녹음해서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다.

첫 번째 중간고사 때였다.

교수가 작은 노트를 나누어 주었다. 15장짜리 노트, 그것이 답안지였다. 한국의 대학교에서처럼 A3용지 한 장이 아니었다. 왜 노트가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아, 워낙 나무가 많은 나라이니까 종이가 흔한 모양이구나.

교수가 낸 여덟 문제 중에서 학생이 각자 네 문제를 선택하여 푸는 것이었고, 주어진 시간은 세 시간이었다.

박태양은 말했다.

두 장 남짓 쓰고 나니까 더 쓸 것이 없었어요. 한 시간 정도 걸렸나요. 그렇다고 답이 부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문제는 충분히 이해했고, 제 나름대로 열심히 썼거든요. 다시 확인하고도 시간이 남아서 답의 문법이나 문장을 다듬었어요. 어떻게 석 장은 채웠던 것 같아요. 다른 학생들은 머리를 박은 채 부지런히 쓰고 있더군요. 공책을 더 요구하는 학생도 있었고요. 저는 늠름하게 앉아 있었어요. 두 시간이 지나자 한두 학생이 답안지를 내고 나가기 시작하더군요. 저도 따라 나갔어요. 

세 시간이 지났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나왔다. 교실 복도에서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그렇게 일찍 나갔느냐고, 몇 장이나 썼느냐고 거푸 물었다.

박태양은 두 장 썼다고, 아는 대로 쓸 만큼 썼다고 대답했다. 말레이시아 출신인 친구가 까무잡잡한 얼굴을 붉히며 나무랐다.

그러면 안 돼. 에세이 형식으로 써야 해.

교수가 요구하는 것은 문제의 답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이고,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결론까지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나름대로는 문제에 대한 답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쓰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에세이라니? 수필을 쓰라는 말이야?

그것이 박태양이 알고 있는 에세이였다.

박태양은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복도를 떠나지 못했다. 어둑어둑해진 복도에서 퇴근하던 교수와 마주쳤다. 교수는 박태양을 데리고 연구실로 되돌아갔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박태양의 답안지를 훑어보고 난 교수가 말했다.

이 답안지는 실패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수준이야.

교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수준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답이 맞고 틀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뉴질랜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박태양의 사정은 변명에 불과했다.

한국에서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결론만 쓴 답안지는 F이다. 이번에는 우선 D를 주겠다, 대신 다음 시험에서 B+ 이상을 받아야 한다.

교수는 친절했다. 하지만 단호했다.

박태양은 꾸벅 인사했다.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나서 중 고등학교에 다닌 백인 학생들도 기한 내에 마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공부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학생 수가 반으로 줄어든다는 과정을 제대로 해낼 것 같지 않았다. 이곳에서 공부를 한다해도 졸업을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도에서 포기라도 하게 된다면 더 곤란할 것 같았다. 한국에서 대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군복무 3년이라는 공백이 있었고, 아직 서툴기만 한 영어였다.


 < 다음호에 계속>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04-22 20:50:48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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