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소설

개척자들,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다.; 2.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일요시사 0 616

일요시사는 700호를 기념하여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실으려 한다. 


50여 년 뉴질랜드 이민 역사의 초창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먼저 살았던 사람의 삶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 마련이다. 


그 삶이 위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시대를 살아온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그 시대를 되돌아보는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들의 관심과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사랑으로 

 

린다는 아침 일찍 일어났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앞치마를 두르고 어머니를 도와 식사를 준비했고, 출근하는 아버지에게 공손하게 인사했고, 먼저 설거지를 했고, 집안 여기저기 청소를 했다. 

 

박태양은 아버지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날을 기다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하던 공부를 마저 했으면 합니다. 

아버지가 소파 끝으로 다가앉으며 특유의 사투리로 물었다.

와?

박태양은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담배를 끊었던 아버지는 담배를 급히 피웠고,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비벼 껐다. 가장 화가 났을 때의 모습과 그 화를 억누르는 모습이 몇 초 사이에 일어났다. 아버지는 박태양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공부가 힘들모, 그라모 뭐 할래?

한국전쟁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병력을 징집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징집자 명단에 가장 먼저 써넣은 이름은 친동생의 이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업무를 담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럴 줄 몰랐나? 절로 되는 줄 알았더나? 못 하겠나? 그라모 짐 싸서 돌아가라.

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무릎에 올려놓은 박태양의 주먹에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무엇을 할 것인지, 밤새 고민했다.

박태양은 빅토리아대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학생이었다. 몇 년이나 어린 백인학생들에게 지기 싫었고, 공부를 못해서 도중에 그만 둔 한국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인은 공부를 못한다는 말이 남겨지는 것은 더욱 싫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긴 해도 공부는 단지 공부였다. 해외유학이라는 것이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엄청난 혜택이었고, 평생에 다시없을 기회였다. 언젠가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정하고 나자 아침이 더디게 왔다.

다음 날 아침, 박태양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밤새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아들의 푸석한 얼굴과 충혈된 눈을 힐끔 쳐다보았고, 허리를 숙여 구두끈을 매었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출근했다. 어머니가 큰 한숨을 내쉬며 박태양의 등을 쓰다듬었다.

박태양은 마음을 고쳐 잡았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웠고, 밥 먹는 시간이 금쪽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잠을 줄였고, 밥 먹는 시간을 줄였다.

책을 통째로 외웠다. 스스로 출제자가 되었고, 학생이 되어 답안을 쓰고 또 썼다.

그냥,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임기를 마쳤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다음 임지인 LA로 떠났다. 박태양은 웰링턴에 혼자 남았다. 세상에 쉬운 공부가 어디 있으며, 어렵다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뭘 하겠느냐는 아버지의 말이 박태양을 다그쳤다. 

그래서 한눈을 팔지 않았다. 한눈을 팔지 않았는데, 동양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니 저 멀리 걸어가는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뛰었다.

박태양에게는 희미한 그러나 가슴 아픈 사랑이 있었다.

사학과 여학생이었고,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했던 상대였다. 그녀는 박태양이 제대하기를 기다렸고, 일주일마다 애틋하고 예쁜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를 기다리는 즐거움과 읽는 기쁨으로 버텼다.

박태양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공부를 해야겠다는, 삼사 년 정도 기다려줄 수 있겠느냐는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에게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짧은 편지가 왔다. 그것으로 완전한 이별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빌었다.

 

그 여학생은 전공은 달랐지만 홍콩에서 유학 온, 린다였다. 동양인이 거의 없었던 대학이어서 어디서나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박태양의 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가곤 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운동장 벤치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가끔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교외로 나갈수록 경치가 좋았고, 무엇보다 집들이 좋아 보였다.

뉴질랜드는 농부들이 잘 사는 나라인가 봐. 

도시 출신인 두 사람은 공감했다.

이런 나라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린다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다고 생각했다. 박태양은 외롭지 않았다. 린다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린다도 외롭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공부가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에게 그리고 공부에 몰두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동화처럼 이어졌다. 린다는 점점 아름다워졌고, 점점 성숙해졌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린다가 홍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하며 염려했던 일이 현실이 나타났다. 다른 나라 사람과의 사랑 그리고 결혼이 널리 이해되고 쉽게 용납되던 시절이 아니었다. 린다의 부모는 장래가 불확실한 한국인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홍콩에는 가족과 반듯한 직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태양은 또 다시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지난 사랑이 얼마나 아팠던가, 그녀를 얼마나 아프게 했던가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린다가 없었다면, 공부를 마칠 수 있었을까. 가족이 떠난 후의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을까. 린다는 친구였고, 연인이었고, 동료였다. 박태양은 기회를 달라고, 장래가 불확실한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박태양은 빅토리아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석사와 박사과정을 제외한 한국인 최초의 학부과정 졸업생이었다.

박태양은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 온 AMP 보험회사와 National Bank(현ANZ BANK)에 응시했다.

두 군데 모두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특히 박태양의 성실함을 익히 알고 있는 ANP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박태양은 National BANK를 선택했다. 

같은 금융계통이긴 해도 보험회사보다는 은행에서 근무하는 것이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태양은 린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꼭 결혼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을 서둘렀다.

아버지는 미국의 LA 총영사로 재직 중이었고, 가족들은 미국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친구와 함께 가도 괜찮은지를 물었고, 친구로만 여긴 어머니는 허락했다.

박태양은 린다와 함께 미국으로 날아갔다. 당시, 뉴질랜드에서 미국으로 가는 노선은 샌프란시스코행 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버클리대학 건축과에 다니는 동생이 있었다.

먼저 동생에게 린다를 소개하며 도움을 청했다. 동생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형수님.

두 사람은 LA로 갔다.

어머니는 박태양이 졸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몇 군데 맞선자리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린다를 소개했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몇 년 만에 아들을 만난 부모님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당황스러움이 함께 스쳤다.

린다가 머물 수 있는 방은 내주었지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박태양이 부모에게 실망을 끼쳤다는 죄책감에 빠져 움츠리고 있는 동안, 린다는 아침 일찍 일어났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앞치마를 두르고 어머니를 도와 식사를 준비했고, 출근하는 아버지에게 공손하게 인사했고, 먼저 설거지를 했고, 집안 여기저기 청소를 했다. 

영락없는 참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린다의 꾸밈없는 행실은 부모님의 마음에 들었다.

결국 부모님은 결혼을 허락했다. 비록 외국인이지만 현명한 여자를 며느리로 맞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아들이 실연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박태양 약력

 

1973년~1975년

Victoria University of Wellington, 경제학 전공

1974년         한인회 회장

1976년~1979년  National Bank of New Zealand 근무

1980년          L M Rankine Trading Co LTD 설립 

                Park Shipping Service LTD 설립

1983년         대한민국 정부 석류장

1997년         대한민국 정부 목련장

1998년         New Zealand Order of Merit

2000년         New Zealand, Wellington

                자랑스런 시민상

2002년         Justice of Peace

2005년         New Zealand Center for Culture and

        Education(서울) 설립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04-22 20:51:37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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