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소설

개척자들,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다. 4회.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로

일요시사 0 520

일요시사는 700호를 기념하여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실으려 한다. 

 

50여 년 뉴질랜드 이민 역사의 초창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먼저 살았던 사람의 삶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 마련이다. 

 

그 삶이 위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시대를 살아온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그 시대를 되돌아보는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들의 관심과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마무리

 

한국인들에게 단지 푸르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로만 알려져 있는 뉴질랜드의 참된 모습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또한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나라가 아닌, 전쟁의 폐허에서 기적을 이룩한 나라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신없이 시간을 썼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러가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일에 얽매이는 것이 낫다고 여겼던 세월이었다. 난관을 마주칠 때마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당장 주저앉고 싶기도 했지만 절망하지 않은 것이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잠시나마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둘러볼 기회조차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던 세월이었다.

그 세월 동안,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뉴질랜드 총리를 수행하여 한국에 다녀왔고,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에는 뉴질랜드 선수단의 Attache(행정 및 총무 임원)으로 참여했고, 각 분야의 여러 단체에 힘을 보탰고, 뉴질랜드와 한국정부의 공로메달을 받았고, 웰링턴의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받았다.

또한 첫해 매출이 백만 불이었던 LG제품은 오천만 달러를 돌파했고, 그 수고와 업적을 인정받았고, 걸맞은 보상을 받고 사업권을 LG에 돌려주었다. 그 후 LG 현지법인은 짧은 시간 내에 일억 달러를 달성했고, 기스본의 숲에서 벌채된 원목들이 한국으로 실려 갔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한다는 칭찬도 들었고,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도 샀다. 그렇다면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때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뭘 하겠느냐고 묻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저는 열심히 살았을까요? 부끄럽지 않은 아들인가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협심증과 부정맥이 심장이 약했던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병상에서도 아버지는 부모와 아내와 자식들을 염려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의 절차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묘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천국 어디에서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으리.

사랑하고 존경하는 순자(안젤라)와 이곳 가족묘역에서 평화롭게 영면하고 싶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여섯 살 터울의 동생 기양이 가족의 곁을 떠났다. 동생 기양은 미국의 버클리대학 건축과를 졸업한 후, 일찌감치 미국에서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고, 사업을 건실하게 이끌었다.

평소에 건강했던 동생은 사업만큼이나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체중이 6~7kg 줄긴 했지만 운동의 효과로만 여겼다. 한국에 왔다가 의사인 친구의 권유로 받은 건강진단에서 폐암이 발견되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도리어 동생의 몸은 허물어져 갔다.

불과 오십 대 중반이었다. 기양은 착한 막내아들이었고, 선량한 동생이었고, 성실한 생활인이었다. 그리고 좋은 남편이었고, 자랑스러운 아비였다.

한창 왕성하게 일할 시기였고, 그래서 너무 아까웠다.

이건 아니라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 사이에 아버지와 동생을 떠나보낸 박태양은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았는지를 절감했고, 뭔가가 허물어져 내리는 듯한 허탈감을 느꼈다. 게으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열심히 일했는데, 열심히 일했던 자신은 사라지고 자신이 몰두했던 일만 남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홀로 남은 어머니가 가슴을 찔렀다. 함께 산 세월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던 그래서 제대로 모시지 못했던 어머니였다. 충격과 슬픔에 빠진 어머니를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장남인 박태양의 의무이기도 했다.

그것은 어려웠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라,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와 자식들이 살고 있는 나라, 자신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던 나라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박태양은 시간을 반으로 나누었다. 절반은 내 가족들과, 그리고 다른 절반은 부모와 형제를 위해 쓰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박태양은 한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한국인들에게 단지 푸르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로만 알려져 있는 뉴질랜드의 참된 모습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또한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나라가 아닌, 전쟁의 폐허에서 기적을 이룩한 나라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뉴질랜드와 한국의 장점을 모아보면 어떨까.

뉴질랜드의 가장 우수한 장점은 무엇이며, 한국의 가장 강력한 장점은 무엇일까. 

인구가 삼백여 만 밖에 되지 않으면서 노벨상을 세 사람이나 수상한 뉴질랜드의 교육, 문화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한국의 기술과 열정을 한데 어우를 수 있다면.

사실은 오래전부터 구상해 왔던 그림이 있긴 했다. 영국문화원을 모델로 하면서, 정부기관인 문화원의 역할을 민간차원에서 수행한다면 좀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은 혜택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박태양의 구상은 뉴질랜드와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각계 인사들의 호응을 받았다.

2005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뉴질랜드교육문화원을 열었다.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파테하 무용단을 파견하여 개원식에 힘을 보태주었다.

뉴질랜드의 교사들을 초빙하여 현지와 똑같은 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의 장점을 부각하는 뉴질랜드의 교육 방식대로 매주 금요일마다 잔치를 열어서 아이들을 칭찬하고 격려했다. 잔치가 시작할 때 아이들은 뉴질랜드의 국가를 불렀고, 마친 후에는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불렀다. 교육문화원에서 영어를 처음 배운 아이들에게 뉴질랜드는 더 이상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교육보다는 즐겁게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감을 느끼고 도전정신을 길러 주는 것, 이 세 가지를 갖췄을 때 가장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교육문화원을 찾아온 기자에게 박태양은 그렇게 말했다.

 

교육문화원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거기서 보람이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 어머니가 쓰러졌다. 병실 창밖으로 먼동이 터오는 새벽에 어머니 김순자는 눈을 감았다. 손과 발이 뻣뻣해지면서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일 년 사이에 어머니는 두 번의 장례식을 치뤘다.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의 장례식장을 가득 메운 조문객들 앞에서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담한 몸을 가린 까만 상복 앞으로 양손을 모아 잡았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발인 때, 어머니는 울먹이는 며느리와 손자들을 감싸 안고 어깨를 쓸어주었었다.

수줍음이 많아서 남들 앞에 나서기 보다는 붓글씨를 즐겼던 조용한 여학생이었고, 스스로를 밥쟁이라고 부르며 가난한 공무원의 아내이기를 고집했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슬픔과 충격을 가슴 속에서 혼자 갈무리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박태양은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박태양은 고아가 되었다. 부모 형제로 이루어진 한 가족에서 오로지 혼자 남겨진 고아 말이다.

 

저희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어머니는 참 미인이셨어요. 그리고 자존심이 대단했지요. 가난한 공무원 살림에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면서 한 번도 투정부리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우리 어머니, 아무리 불편해도 몸져눕는 일이 없었습니다. 

 

박태양이 휴대전화를 열었다.

겉표지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을 한 번 보았고,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보세요. 예쁘지 않습니까. 내 손자라서 예쁜 것은 아니에요. 요즘 아이들, 모두 다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랄 때와는 달라요. 이렇게 예쁜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해 줄 일이 뭐 있겠습니까. 아이들의 교육에 신경 써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인 겁니다. 그런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박태양은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창문 쪽을 바라보며 손가락 두 개를 번갈아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모든 것에 감사할 뿐이지요. 그럼요. 오늘날의 저를 있게 한 모든 것에 말입니다.

화창한, 그리 덥지 않은 뉴질랜드의 여름날이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06-05 11:37:07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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