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4-3) 남국정사 주지 동진 스님

뉴질랜드 이민 열전(4-3) 남국정사 주지 동진 스님

일요시사 0 465

통도사 가는 길에 묻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출가스님 안 됐으면 정치가나 예술인 됐을 것

 

사람은 떠날 때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스무 해가 넘는 역사를 지닌 남국정사는 기반과 안정 단계를 넘어 지금 도약 단계에 와 있습니다. 남국정사의 오랜 꿈인 큰 건축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저보다 능력과 도력이 훌륭한 스님이 일을 맡아야 합니다. 저 개인적인 영광보다는 절을 먼저 생각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풍경 달다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내게 묻는다 깨어 있느냐?”

처마 밑, 풍경(風磬)을 잡아 사알짝 흔든다. 바람결에 종이 울린다.

내게 묻는다.

깨어 있느냐?”

얼마 만인가? 풍경 소리. 동진 스님을 만나러 간 세 번째 날, 유독 날이 맑았다. 저 멀리 떠 있는 뭉게구름에 나는 넋을 잃었다. 잔디와 나무와 구름 그리고 그 너머.

스님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절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그때 본 작은 풍경하나와 맑디맑은 구름. 마음이 한없이 포근했다. 자연이 빚어낸 조화와 자연이 스쳐간 소리에 나는 긴 숨을 쉬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이었다.

 

열두 살 소년의 통도사 가는 길

왜 출가하셨나요?

스님이 건넨 차를 받자마자 나는 물었다.

스님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나는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고, 스님은 답하기 거북한 지난날을 풀어놓았다.   

1968 12월 어느 날, 열두 살 소년 동진(東珍)은 이종사촌 형의 손을 잡고 통도사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날 무렵이었다.

출가의 뜻을 둔 사촌 형을 따라 동네 마실 가듯 통도사에 갔습니다. 절 근처에 내려 길을 걷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하는 철학적 궁금증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스님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동진은 1946 4 26일 경북 선산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축업을 했다. 기와집이 두 채나 있었고, 논과 밭이 많았다. 그때는 흔치 않은 어린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며, 바나나를 먹기도 했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 정도 먹고 살았다는 것은 좀 있는 집이었다는 뜻이다.

산문에 들어선 날, 그 신비함을 동진은 이렇게 기억한다.

어린 제가 불교를 알면 얼마나 알았겠어요. ‘통도사라는 큰 절이 주는 웅장함에 이상하게 끌렸습니다. 통도사는 남한에서 전각()이 제일 많은 절입니다. 마치 궁궐 같았습니다. 그날 저녁 법회에 참석해 예불을 드렸습니다. 백여 명이 넘는 스님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스님들이 한목소리로 염불을 하는데, 그 소리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 같았습니다. 가슴이 쿵하는 감동이 전해졌습니다. ‘~ 여기가 별세계구나하고 생각했지요.”



뜻도 모른 채 반야심경 외워

어린 동진은 그날로 행자승이 됐다. 그 뒤 몇 달을 스님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불교 세계를 조금씩 알아갔다. 틈틈이 반야심경을 읽었다. 뜻도 모른 채 그냥 외웠다. 열두 살 소년의 또 다른 세계는 그렇게 차츰차츰 열렸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 하나.

왜 어린 동진의 부모는 말리지 않았을까?’

스님의 답이다.

제가 외동아들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부모님이 저의 출가를 크게 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는 동자승이 많았습니다. 아마 그 영향도 있었을 테고, 또 어머니가 불심이 깊어 저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불교에서는 스님이 될 사람은 따로 있다고들 합니다. 아주 집안이 좋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나쁘거나 하는 경우인데, 저는 전자에 속했습니다. 제 복이기도 합니다.”

동진은 밀양에 있는 표충사로 옮겨 효봉 스님의 문도들과 함께 몇 해 더 행자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1972년 송광사에서 사미승 수계를 받았다. 법명은 동진(童眞).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진리에 이른다는 뜻이다. 은사 스님은 효봉 스님을 아란존자처럼 모시던 원명(元明) 스님이었다.

동진 스님은 그 뒤 극락암 경봉 스님 문하에서 참선 수행을 했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  경전 공부를 한 4년을 뜻깊게 기억했다.

불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스님은 해인사로.’ 스님들에게 해인사는 서울 같은 곳입니다. ‘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에서 아함경부터 화엄경까지 전문 과정을 연구했습니다. 불교의 세계를 깊이 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20대 말에 환속진지하게 고민하기도

올해로 동진 스님이 불제자가 된 지 꼭 마흔여덟 해, 스님은 후회가 없었을까?

스님이 되신 것을 후회하거나, 중간에 환속하고 싶었던 적은 없으셨나요?”

스님은 웃으며 말했다.

왜 없었겠습니까. 20대 말에 사랑과 이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환속을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이 길이 정말로 내 길인가하는 생각 때문에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어 전보다 더 정진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잡념이 없어졌고, 부처님 세계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살짝 정보(?)를 흘렸다.

요즘 출가한 스님 가운데 반 정도가 중간에 환속을 한다. 현재 스님 숫자는 약 2만 명 가량. 출가하는 숫자가 적어 불교가 힘든 상황에 있다. 조계종 차원에서 출가 웹사이트를 만들 정도다. 한두 자녀만 낳는 풍조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스님이 안 되셨다면 무엇이 되셨을 것 같으세요?”

스님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

아마~ 정치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군인. 예술가나 문학인이 되었을 것 같기도 하고. 제가 그쪽에 관심이 많습니다.”

 


문학 석사 출신, 헤세와 추사 김정희 좋아해

동진 스님은 문학 석사 출신이다. 처음 스님을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이력을 잘 몰랐다. 하지만 대화 도중 스님의 가 범상치 않게 다가왔다. 영문학(나는 학사 출신이다)을 전공한 나보다 한 수 위로 느껴졌다. 나도 문학하면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있는데. 스님은 늘 나보다 얘기가 깊었다. 석사 앞에서 학사는 수행승일 뿐이었다.

스님은 <데미안>을 쓴 헤르만 헤세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니체를 좋아한다. 다들 서양인이면서도 동양 종교인 불교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작가이다. 스님은 또 브람스의 음악을 사랑한다. 추사 김정희와 초의 선사도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 외 다도와 건축에 일가견이 있는 전방위 예술 애호가이다.

속세를 떠난 스님의 지난날을 물어보기가 쉽지 않았다. 오직 붓다와 함께한 시간만 있었다. ‘좀 그럴듯한 얘기를 듣고 싶었던 내 호기심은 스님이 너무 일찍 출가한 탓에 무위로 끝났다. 그런데도 스님의 문학 사랑, 예술 사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가 이어졌다.


 


종교 지도자 모임 못 가져 아쉬워

동진 스님은 이제 정든 남국정사를 떠난다.(4월 중순 예정) 열한 해가 넘는 긴 시간을 함께 했다. 그의 아쉬움은, 기쁨은 무엇일까?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을 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교민 사회가 잘 되려면 정신적 지도자인 종교 지도자들이 뜻을 모아야 합니다. 제 나름대로는 하려고 했지만 여러 조건이 안 맞아 결국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 후임이라도 그 마음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맛본 기쁨은 어떤 것일까?

다른 종교에 비해 불교 교세가 너무 미약했습니다. 문화와 스포츠를 통해 교민 사회와 소통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자주 말씀드렸지만 종교는 결코 세상과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희 남국정사가 교민 사회에 조금은 힘을 보탰고, 또 앞으로도 꾸준히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생각해 주시길

남국정사 신도들은 왜 동진 스님이 뉴질랜드를 떠날까 궁금해한다. 그동안 대과 없이 잘 해왔고 아직은 좀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그럴 것이다.

사람은 떠날 때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스무 해가 넘는 역사를 지닌 남국정사는 기반과 안정 단계를 넘어 지금 도약 단계에 와 있습니다. 남국정사의 오랜 꿈인 큰 건축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저보다 능력과 도력이 훌륭한 스님이 일을 맡아야 합니다. 저 개인적인 영광보다는 절을 먼저 생각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늘이 맑고 풍경 소리 울리던 날, 그날 대화는 속세와 선계를 오갔다. 내가 얘기의 끝을 맺으려하자 스님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박 선생, 내 나이가 올해 환갑입니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오십오 세가 넘자 그 무엇보다 자연의 소리가 좋더군요. 책보다 음악보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더 좋아졌습니다. 나도 늙어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도력이 더 깊어진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내게 한 가지 멋진 이벤트를 해 보라고 말했다.

박 선생, 언제 시간 나면 차 한 잔 들고 바닷가로 가십시오. 보름달이 떠오르는 음력 14~16일이면 더 좋습니다. 파도 소리를 벗 삼아 찻 잔에 달을 담아 비춰보면서 한 잔 두 잔 마시는 달빛 차회를 한 번 해 보세요. 정말 운치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시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마지막 그 말을 하면서 스님이 웃었고, 나도 덩달아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스님은 내 웃음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유는~ 보름달 밝게 뜬 그 어느 날, 오레와 바닷가(Orewa Beach)에서 확인해 보시길.<다음 호에 계속>

_프리랜서 박성기

[이 게시물은 일요시…님에 의해 2016-04-27 16:09:12 뉴질랜드 Story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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