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감사
NZ광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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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16:03
벌써 20여 년이 넘은 사건(?)이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경상남도 창원으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어 가까운 마산에 있는 본가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 당시엔 여느 직장인처럼 술과 담배에 젖어 사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아내와 함께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나의 생활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2년 뒤에 다시 본사로 왔을 때, 함께 술자리하지 않는 나를 보고 동료들은 창원이 사람을 완전히 버려놓았다며 놀려 대곤 했다. 출퇴근이 수월한 수원에 집을 구하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 다니기로 결정했다. 많은 교인들이 사랑으로 반겨 주었다. 수원의 변두리에 위치한 교회인데, 9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등록교인 300명 정도 되는 작은 교회였다. 성도들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4~5개월 지날 무렵, 예전 창원에서 다니던 교회와 자꾸 비교가 되면서 내 마음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창원교회와 달리 너무 시골스러운 부분이 많았던 터라, 모든 부분에서 비교되었던 것이다. 내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부분은 바로 성도들이었다. 내가 갖고 있던 기준과 개념을 벗어난 그들의 행동과 말투..., 교회 올 때 슬리퍼를 끌고, 몸뻬바지를 입고, 거칠게 말하는 그들을 볼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배도 은혜가 안되고 신앙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결국 출석하는 교회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목사님에게 말할 변명거리가 없었다. 목사님을 서운하게 하지 않고 교회를 떠날 방법을 모색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회사일이 바빴지만 1주일간 새벽 기도를 하기로 작정했다.
월요일부터 시작한 기도에 금요일 아침까지도 주님은 응답하시지 않으셨다. 그날 밤 10시에 시작하는 철야 예배에 참석했다. 30분 찬양, 30분 공동기도가 끝나고 개인기도 시간에 나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집 이사를 통하여 교회옮기는 것을 허락하여 달라고 매달렸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강요였다. 한참을 기도해도 편안한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때! 시간은 정확하지 않지만 12시가 가까웠을 것이다. 무릎을 꿇고 벽을 향하여 기도하던 나는, 심장을 통하여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간 숨이 멈췄다. "지금 네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이 성전에 너는 벽돌 한 장이라도 쌓았느냐! 네가 무시하는그들이 이 성전을 지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교회를 옮기게 해달라고 매달리던 내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머리를 무릎위에 대고 회개로, 기쁨으로, 감사로 통곡하고 있는 내 모습만 남아 있었다. 몇 달 동안인지 몇 년 동안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꽤 오랫동안 나는 교회에 가서 앉을 때마다 울었다. (몇 년 뒤 빚을 다 갚고 봉헌식 때, 가난한 동네 성도들의 교회 건축에 헌신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때 목사님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셨고 여기저기서 성도님들의 꾸억꾸억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초대 교
회 성도들이 그러했으리라...) 나를 힘들게 했던 성도님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 같았다. 주님이 그 마음을 주셨을 것이다. 이 응답에 대한 기쁨의 눈물은 봉사로 이어졌고, 이민 오기 전까지 나는 교회에 열심히 봉사했다. 주님의 그 사랑에 감사해서 헌신했다. 그리고 이민 올 때 대예배 시간에 나에게 주신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의 사랑의 줄로 하나가 되어 있음’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 소개한 교회는 서수원에 위치한 오목천 감리교회이다. 몇 년 전에 교회를 또 새로이 건축하였고 200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뉴질랜드 광림교회 조동래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