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신 목적과 사명에 전심전력 하는 교회, 행 2:42-47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목적과 사명입니다. 반대로, 실패하고 후회하는 인생은 인생의 목적과 사명 없이 분주하기만 합니다. 유명한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가 날벌레들의 생태를 관찰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날벌레들은 아무 방향이나 목적 없이 자기 앞에서 날고 있는 다른 날벌레만 따라서 빙빙 도는 것이었습니다. 돌고 있는 바로 밑에다 먹을 것을 놓아도 관심 없이 계속 돌기만 합니다. 이렇게 무턱대고 7일 동안이나 돌던 날벌레들은 결국 굶어서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통계에 의하면, 이 세상에 아무런 목적 없이 돌기만 하다가 죽는 날벌레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전체 인류의 87%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와 달리 목적과 사명을 잃지 않고 인생은 다른 사람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해내고야 맙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처음에 기뻐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실 때 솔로몬은 그에게 맡기신 백성을 잘 다스릴 지혜를 달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왕으로 세우신 목적과 사명을 말한 것입니다. 이런 솔로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솔로몬이 구한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재물과 존귀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정확히 알고 그걸 이루어드리고자 힘쓸 때 그 인생을 놀랍게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많은 교회가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다른 것에 관심과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목적과 사명에만 올인 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목적과 사명은 무엇이 있습니까?
1. 교회의 첫 번째 목적은 예배입니다.
본문 47절에 보면,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였고 하나님은 그 찬미의 자리에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할 때 가장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 하나를 부르더라도 온 마음과 정성으로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여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예배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살아 역사하고 역동적인 예배가 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1)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성령을 사모하는 자리에 임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간절히 사모했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2)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영적인 귀가 열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집니다.
3) 구원과 치유가 있을 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 911테러가 난 직후 충격과 공포에 싸인 많은 미국인들이 몰려간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들은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충격을 받고 공포에 싸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을 때 그들은 참된 위로자, 치유자, 그리고 구원자 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입니다.
2. 교회의 두 번째 목적은 가르치고 배우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본문 42절 보면,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예전엔 어렵기만 했던 말씀이, 왠지 모르게 더 듣고 싶어지고 더 알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하나하나가 귀하게 다가옵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이러한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꿀보다 달다”는 말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 새벽에, 역대하를 묵상하는데 큰 은혜가 있습니다. 특별히 유다의 여호사밧 왕의 행적을 기록한 역대하 17장에 보면, 여호사밧 왕은 나라에 우상들을 제거하고 나서 특별한 조치를 취했는데. 그것은 유다의 모든 성읍들마다 지도자들을 하나씩 보내서 “가르치게” 한 것입니다. 또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보내서 두루 그 성읍들을 돌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가르치게” 한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치게 했는가 하면 율법 책을 가지고 가르치게 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모아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고 백성들은 그 율법을 열심히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나라를 강성케 하셔서 사방 모든 나라들이 그 유다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강성해지고 악한 영들이 두려워 떠는 비결은 성도들이 교회로 모여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교회의 목적은 교제입니다.
본문 42절 중간에 보면,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떡을 떼는 것,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교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교제’와 ‘떡을 떼는 것’을 따로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앞의 ‘교제’는 단순히 떡을 떼는 교제가 아니라 영적인 교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떡을 떼거나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것에 앞서 영혼의 교통, 즉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도 간에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면, 영혼이 풍성해집니다. 인간적인 대화를 하고 나면 피곤하고, 상처받고, 때로는 허무하지만, 영적인 교제를 하고 나면 곤고함이 사라지고, 이상하게 새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영적인 교제가 풍성해져야 합니다. 성도들이 서로 간에 영적인 교제가 풍성해질 때 교회는 부흥됩니다.
또한 교제 가운데 우리가 절대로 빠트려서는 안 되는 교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42절 보면, 초대교회는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오로지’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우선시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의 어떤 교제보다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우선해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4. 교회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목적과 사명은 전도입니다.
본문 47절에서 초대교회의 역사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목적입니다. 교회가 있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전도가 없고 구원의 역사가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전도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초대교회는 불신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떤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보다는 세상의 사람들 보기에 당시 교회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룩함과 신적인 능력을 그들이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교회가 백성들과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47절)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람들에게 삶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며 관심과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으로 예수님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칭송받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전도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