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153 ; 사랑을 하며는,,,
봉봉사중창단이 부른‘사랑을 하며는 예뻐져요’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을 하면 정말 예뻐진다. 성형수술을 해서 작은 눈이 커지고, 낮은 코가 높아지거나, 누구처럼 보톡스 주사를 맞고, 리프팅 시술을 받아서 예뻐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랑을 하면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일하면서도 콧노래가 절로 나고, 한 마디로 하루하루가 즐겁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니, 일도 덜 힘들고, 안 될 일도 잘 된다. 얼굴도 밝아지고, 입에서 나오는 말에도 사랑의 향기가 배어나고, 손짓도 몸짓도 예뻐지고, 모든 게 다 예뻐진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면 더욱 아름다워진다. 얼굴이 깨끗해지고, 맑은 빛이 난다. 근심 걱정과 피로로 상한 얼굴에 생기가 돌게 된다. 마음이 예수님 생각으로 꽉 차 있으니, 기쁨이 넘치고, 생기가 돌고, 사는 것도 즐거워진다. 얼굴만 깨끗해지고 예뻐지는 게 아니다. 영혼까지 맑고 깨끗해진다. 삶에서 사랑의 향기가 가득 풍겨나고, 인생까지 아름다워진다.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곤 한다. 그런데 왜 신랑신부라고 했을까? 결혼한 지 오래 된 사람들 보고 신랑신부라고 하지 않는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를 신랑신부라고 한다. 신혼부부,, 신혼부부 때는 서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낮이고 밤이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서 지낸다. 예수님과 성도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과 성도는 신랑신부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랑의 관계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로 여기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항상 같이 있고 싶어 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왜 그럴까? 물론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예수님의 사랑을 몰라서가 아니라, 살면서 그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사랑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신랑신부처럼 사랑이 마음에 딱 붙어있지를 못한다.
우리의 신랑이 누구인가? 우주보다 크신 분이요,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시요,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고, 만물들로부터 영광의 찬송을 받으셔야 할 분이다(골1:16). 그런데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 거지에게 왕자가 혈서를 쓰며 청혼을 한 것이다. 아니, 이런 사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차원이 다른 사랑의 혈서를 받고, 신부가 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사랑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기도할 때만 사랑을 느끼고, 평소에는 내 몃대로 사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혹시 신부가 바람이 난 것은 아닐까?
성경은 세상적인 욕심에 빠지는 것을 간음이라고 말한다.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바람 난 신부들이다. 신랑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바람난 신부들이다. 신부가 바람 피다 들키면, 그날로 끝장이다.
구약 호세아서에 나오는 호세아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한 선지자였다. 그런데 고멜은 아주 음란한 바람둥이 여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왜 호세아 선지자에게 바람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셨을까? 호세아 선지자의 아픈 결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픈 마음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신부가 외간 남자와 간음하는 것과 같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당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외간 남자들과 놀아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 3:1) 하나님께서는 왜 허구헌날 외간 남자들과 놀아나는 아내를 계속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을까? 주님의 신부인 우리가 매일 영적인 간음의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알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여전히 당신의 신부라 하시며, 부르시고 있다. “이제는 내게 돌아와 나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며 살자꾸나. 나의 사랑, 나의 신부야”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자와 살았던 것처럼, 아직도 세상과 간음하며 죄 가운데 빠져있는 성도들과 함께 살고 있으시다. 우리의 죄에 가슴 아파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 변함없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며, 사랑의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사랑을 알지 않느냐? 나의 사랑을 안다면, 이제는 내게 돌아와라. 나의 사랑의 품에 안겨, 서로 사랑하며 살자꾸나. 우리의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로 가득하도록 나와 아낌없이 사랑하며 살자, 나의 사랑하는 신부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세상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또, 요 17:13 “...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은 세상의 돈과 권력과 부귀영화가 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과 사랑을 하면 아름다워진다. 얼굴도 삶도 아름다운 사랑의 빛과 향기로 가득하게 된다. 세상의 향기가 아닌, 예수의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사랑은 예수의 얼굴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