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레 11:45, 벧전 1:15-16)
교회에서 가장 흔하게 듣게 되는 말 중에 하나가 거룩입니다. 거룩하면 점잖은 걸음걸이나 아름다운 언어로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은 거룩의 본질이 아닙니다. 거룩의 본질은 ‘하나님을 위해 나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가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삶으로 고백하는 게 ‘거룩’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끌려가 왕궁에서 살 때, 다른 소년들은 다 왕의 음식을 먹었지만 그들은 자신을 구별하였습니다. 구별하였다는 것은 왕의 음식일지라도 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을 구별하여 채소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음식을 먹은 소년들보다 얼굴이 훨씬 더 윤택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구별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구별함 속에서 신앙의 희열과 감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금의 세대는 악하고 우상이 판을 치는 세대입니다. 마치 바벨론에 끌려가서 영적 도전과 위협을 받은 다니엘과 친구들 같습니다. 이 시험 많고 유혹 많은 악한 세대를 이길 비결은 거룩입니다. 거룩이야말로 세대를 뚫고 나가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거룩하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희열과 감격을 허락하십니다.
1. 거룩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의 맨 처음 다섯 권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이 다섯 권을 모세오경, 토라라고 합니다. 모세 오경은 성경 전체, 특히 구약의 중요한 근간입니다. 오경은 크게 두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1)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창세기에서는 족장들 이야기를 통해서 어떻게 신앙공동체가 생겨났는가를 설명합니다. 또한 출애굽기 1-18장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어떤 자들인가?’ 설명합니다. 그들은 한 때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의 강하신 손으로 구출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이 모세 오경의 첫 번째 메시지가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은혜를 받고 감격합니다. 아브라함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도 그렇게 부르셨음 알게 됩니다. 출애굽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도 저 영적 애굽인 세상에서 나오게 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신앙인으로 내 정체성을 알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경의 첫 번째 파트를 읽고나면, 출애굽기 19장부터는 ‘규빗’으로 대표되는 낯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때부터 민수기 10장 10절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자들은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레위기의 제사 이야기와 법 이야기에 많은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이 모세 오경의 두 번째 파트(출19장~민10장 10절)는 ‘그 이스라엘에 거는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말해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경의 첫 번째 파트에서 발견된 나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라는 하나님의 기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레위기가 어려워 오경의 두 번째 파트를 포기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당면하는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의 성도들은 ‘내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부르셨고, 애굽에서 건지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등한시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 오경의 두 번째 파트는 이것을 말해줍니다. 그 파트의 산봉우리가 레위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레위기는 거룩함이라 대답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2. 어떻게 거룩한 존재가 될 것인가?
거룩에는 두 가지 거룩이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적인 거룩이고, 다른 하나는 행실의 거룩입니다. 존재적인 거룩은 다른 말로하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행위나 노력으로 거룩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거룩한 존재가 되는 비결은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 라는 말에 있습니다. ‘카도쉬’의 의미는 따로 떼어놓다, 구별하다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은 그 자체가 깨끗하고 완벽해서 거룩한 게 아니라 따로 떼어 놓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의미하는 존재적인 거룩입니다.
레위기 8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올 때 백성들을 잘못 인도해서 금송아지에 절하게 한 장본인입니다. 행위로 보자면 절대 제사장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따로 구별하여 세우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도가 된 것은 우리 행위나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셨기에 성도가 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성도가 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20:26)”
3. 거룩한 존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으니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존재적인 거룩 뒤에 필요한 것은 거룩한 행실입니다. 성도는 내가 거룩하게 살아감으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거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예배하는 게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도저히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없는 나를 하나님이 구별하셨기에, 그 은혜에 감격해서 드리는 게 예배입니다.
우리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이 나를 구별하심으로 거룩하게 하신 그 은혜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여기에 보면 행실의 거룩을 말합니다. 행실의 거룩의 핵심은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즉 거룩하신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룩한 존재로 행실의 거룩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