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소망이신 예수님 (이사야 11장 1-5절)

기독교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님 (이사야 11장 1-5절)

  

    1944년 추운 겨울날 집단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모여 하누카 명절을 지켰습니다. 수용소에서는 구하기 힘든 버터를 녹여 촛불을 켰습니다. 그때 그 버터를 구해 온 유대인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왜 그 귀한 버터를 먹지 않고 이렇게 낭비를 하나요?” 라고 항의했습니다. 아들의 항의에 아버지는 너도 알듯이 우리는 밥을 먹지 않고도 3주간을 살 수 있었고, 또 한 때 물을 먹지 않고도 3일 동안 살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소망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단다.” 라고 답했습니다. 이 아버지의 말처럼 사람은 소망이 있어야 삽니다. 그 참된 소망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한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스위스로 여름휴가를 갔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알프스를 올랐는데, 정상에 거의 이르렀을 때 딸이 실족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충격을 받았고, 그가 가진 많은 재산도 그에게 아무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믿어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절망을 극복한 그는 감사한 마음에 딸이 떨어진 곳에 십자가를 세웠고 오직 예수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온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함께 세 가지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예수님의 오심은 바랄 수 없는 중에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2-5)” 이 말씀은 메시야의 됨됨이를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 중에는 이 말씀을 다 만족하는 사람이 절대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이 보내 주셔야하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만이 태초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는 이새의 줄기에서(11:1),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것이라 전합니다. 이 줄기는 멀쩡한 줄기가 아닌, ‘완전히 말라버린 나무 밑동을 의미합니다. 그런 곳에서 한 싹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말라서 죽은 것 같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나무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다윗도 소망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천한 목동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아들의 대열에도 있지 못한 무시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다윗의 줄기에서 메시아가 나오게 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오심은 누구도 메시아를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형편이 이새의 마른 줄기처럼 아무 것도 나올 것 같지 않은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새의 줄기와 같은 절망적인 현실에서 한 싹이 나는 역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이 통치하실 때 완전한 평화가 임합니다.

   ‘메시아는 이런 분이다라는 1-5절에 말씀은 한 마디로 예수님은 완벽한 통치자임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9절은 메시야가 다스리는 메시아 왕국의 특징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평화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11:6-8)” 이 평화는 부분적 평화가 아니라 완전한 평화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은 함께 놀 수 없습니다. 염소와 표범은 함께 누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도 이처럼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평화를 도모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예수님이 통치하시면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완벽한 통치자이시기에 그 분이 다스리는 나라에는 완전한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을 반란군에 의해 잃었습니다. 두 아들은 공산주의 학생들에게 예수쟁이, 친미라는 이유로 총살당했습니다. 그 아들들을 죽인 사람이 안재선 씨인데, 손 목사님은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처형 날 여고생인 딸을 보냅니다. “빨리 가서 안재선 씨가 처형당하지 않도록 막고 자기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라.” 아버지의 뜻이었지만, 자기 오빠들을 죽인 자를 살려야 한다는 것에 너무도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결국 안재선씨는 손 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손 목사님은 그를 신학교에 입학시키고 공부도 시켰습니다. 화평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2:14)”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완벽한 통치자로 임하신 결과로 화평,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3. 예수님이 임재하시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복은 메시아가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11:10-16). 이 회복은 열방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되는 회복입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11:10)” 메시아가 임하실 때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열방 즉 이방의 민족들이 그 앞에 나아온다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당시 한 선지자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듯 했지만, 놀랍게도 수많은 열방이 그 십자가 앞으로 나와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방인이며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외인인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원하십니다. 나를 통해 믿지 않는 자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복음의 역사는 내 안에 갖고만 있어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비하신 영혼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해 그들이 회복될 때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최고의 목적이요 목표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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