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구원에 전심전력하는 교회가 됩시다. (막 2:1-12)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반드시 세 가지를 알아야합니다.
1)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라면 우리는 몸의 지체입니다. 몸의 지체는 머리의 명령과 지시를 잘 따라야 합니다. 지체가 머리의 명령과 지시를 잘 따르지 못하면 그건 장애입니다. 마찬가지로 머리이신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께 온전히 순복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2) 우리가 곧 교회이고, 나아가 내가 곧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몸에 문제가 있다고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는 없습니다. 한 몸인 성도는 아파도 붙어서 아프고 괴로워도 붙어 있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교회는 하나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바르고 성숙한 신앙의 길입니다.
3) 교회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게 영혼을 구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선, 주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영혼구원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화려하고 그럴 듯해도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네 친구와 한 중풍병자의 이야기는 영혼구원에 전심전력하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인파가 있었음에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네 친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붕을 뜯어 병자를 달아 내리는 열정으로 죄 사함과 고침을 받게 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영혼을 구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3가지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1.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나는 교회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셨는데 많은 사람이 모여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막2:2). 사람들이 몰려온 것은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입니다(막2:1). 이처럼 교회도 ‘그 교회에는 예수님이 계시더라’ 라는 소문이 들려야합니다. 교회에는 누구보다 예수님이 계셔야 하고 그 예수님이 계신다는 소문이 나야 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사람만 있으면 그건 교회가 안 됩니다.
한 흑인이 미국 남부를 여행하다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교회를 갔는데 그곳은 백인들의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들어가자 교인들이 막아섰습니다. 이유는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서 쫓겨난 흑인은 예배당 바깥에 앉아 기도하는데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그의 어깨를 감쌌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 억울합니다. 저는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아들아 너무 섭섭해 하지 마라. 나도 그 예배당에서 쫓겨났단다.”라고 답하셨습니다. 결국 교만과 편견 때문에 예수님도 그 교회에 계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내가 드러날수록, 인간이 드러날수록 예수님이 계실 자리가 없어집니다. 반대로 내가 드러나지 않을 때, 예수님이 드러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영혼 구원을 위해 절박함과 열정을 가진 교회입니다.
중풍병은 뇌로 가는 혈관이 막히거나 터짐으로 몸에 마비가 오는 병입니다. 한 마디로 중풍병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병입니다. 본문의 중풍병자도 예수님께 가고 싶으나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천사와 같은 네 명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풍병자를 메워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막2:3). 여기에는 두 가지 귀한 자세가 있습니다.
1) 믿음입니다.
‘이 친구가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분명히 중풍병을 나을 것이다.’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그 수고와 헌신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어 용기가 났고, 헌신이 되었습니다.
2)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 가고 싶은데 자기 힘으로 갈 수 없는 친구를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한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두 가지 귀한 자세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가지고 갔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막2:4). 예수님을 먼저 보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이 장애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네 명의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장애물을 극복했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막2:4)’ 그들은 예수님께로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뜯어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남의 집의 멀쩡한 지붕을 뜯어서 거기로 병자를 달아 내린다고 하는 것은 기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비난과 욕을 먹을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한 영혼을 예수님께로 데려가고자 하는 네 친구의 절박함과 열정은 어떤 비난과 욕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뛰어넘었습니다. 이처럼 전도는 믿음과 긍휼, 그리고 영혼에 대한 절박함이 있을 때 이루어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3. 죄 사함의 능력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네 친구의 믿음과 열정에 예수님은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2:5)’ 예수님은 병 낫기 위해 온 중풍병자에게 “네 병이 나았느니라” 하지 않으시고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알려면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죄와 고통을 완전히 연결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중풍병자 같은 사람은 육체의 병만이 아닌 죄를 안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중풍으로 육신만 마비된 게 아니라 무서운 죄책감으로 영혼이 마비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보실 때 그 영혼이 죄와 죄책감으로 결박을 당하고 마비된 것을 보셨습니다. 그에 대하여 죄의 문제를 말씀하시고 죄 사함의 선포하셨습니다. 이 죄사함의 선포는 오직 예수님만이 교회만이 가능한 선포입니다. 그 죄사함의 권세를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