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 나를 사랑하는 주님 호세아 2:21~23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 나를 사랑하는 주님 호세아 2:21~23

일요시사 0 1146

호세아 2:21-23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3.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려져 있습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정숙하지 못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멜은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방황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다시금 고멜을 데려와서 가정에 정착하게끔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정숙한 여인, 현모양처를 아내로 삼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정숙하지 못한 여인, 가정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 호세아서의 주제는 한 마디로 이겁니다. “사랑 받을 수 없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지금 현재 이스라엘의 모습은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신앙의 절개를 잃어버렸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부르시고, 찾으시고,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라는 선지자의 가정사를 하나의 교재로 삼아서,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과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당시 북이스라엘만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기에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택하여주시고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가 그 사랑을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닫는 그 때가 옵니다. 그 때 뭐라고 하나요? “철들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에 합당한 예배의 삶,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어떤 면에서 신앙의 철이 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흔들림이 없다는 겁니다.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삶 속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 뭔지 아십니까? “절대”입니다.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 “절대”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절대라는 말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람들의 관계, 사람들의 삶은 모두 다 예측 불가능하고, 항상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은 다 상대적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잘 대해주면, 나도 잘 대해줍니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나도 싫어합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것, 심는 대로 거두는 것. 이게 세상의 삶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 안에는 “사람도 포함되고, 그 중에는 의인도 악인도 다 들어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다 포함됩니다. 더불어 모든 자연만물까지 다 들어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있는 사랑입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불변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모습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 아닌,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3장 1절에 보면 “지금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기고 있을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지금 어기고 있는데도, 그 이방의 제사상에 올라간 건포도 과자를 먹으면서 웃고 떠들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는 호세아도 보십시오. 고멜을 위하여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라는 값을 지불합니다. 고멜은 가정을 떠났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갔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러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또 가서” 다시 그 아내를 찾아가서 댓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 여인을 데려오라 하십니다. 이 모습은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우상을 섬기고 있을지라도 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너희를 품어 줄 터이니, 다시 돌아오라.” 이러한 사랑의 표현으로 오늘 호세아가 지불한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바뀌어 죄의 자녀 된 우리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새겨져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십자가 죄 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우리가 늘 연약하고 부족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갈지라도 끝까지 품어 안으시는 주의 사랑... / 그 사랑을 깨달아 알 때에,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예배하게 됩니다. 지금도 나를 향하신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감사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응답하시는 은혜입니다. 2장 21절과 2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원래 1장에 보면 호세아의 아들에게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데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르엘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입니다. 이렇게 좋은 땅이기 때문에 한 편 전쟁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이스르엘하면 두 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완전히 상반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이미지가 공존합니다. “풍요와 전쟁”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첫 번째 아들에게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유가 바로 이와 연관됩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이스르엘에 응답하신다는 것은 다시금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심판의 응답이 있고, 그럼에도 돌이키게 하시고, 돌아오는 자에게 베푸시는 풍성한 축복이 동시에 담겨 있는 거죠. 심판으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끊임없는 사랑을 베푸시고, 다시금 돌아와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의 은총 안에 거하는 삶. 오늘 이스르엘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죄와 심판, 그리고 돌아섬과 회복, 이어지는 축복과 풍요함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의 자리는 다 이스르엘입니다. 그 장소에 나 혼자, 내 마음대로 서 있으면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 전쟁의 자리가 되는 것이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고, 주님과 동행하면 그 자리는 풍요가 넘치는 응답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정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삶의 이스르엘에 어떤 씨앗을 심고, 어떤 응답을 누릴 것이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 늘 축복의 손을 펼치십니다. 내 안에 예수님만 계시다면, 내 마음에 주의 말씀만 새기고 있다면, 내 손에 주를 위한 사명이 담겨져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풍요함으로 응답하시는 줄 믿습니다.

 

끝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은 바로 변화입니다. 오늘 우리가 21절부터 읽었지만, 2장 16절부터 보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어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을 지나 23절이 하이라이트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둘째 이름이 “로루하마”입니다.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셋째의 이름이 “로암미”인데, 그 뜻은 “내 백성이 아니다.”입니다. 그런데 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형제들에게는 “암미”라 하고, 자매들에게는 “루하마”라고 이름하라고 합니다. 앞서 본 호세아의 아들과 딸의 이름에서 “로”만 빠졌죠. 그래서 뜻이 완전히 바뀝니다.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인 로루하마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루하마가 됩니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의 로암미가 “내 백성이다.”라는 뜻의 “암미”가 됩니다. 그래서 23절에 말씀하는 거죠.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항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삶의 변화, 여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단지 예수님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믿는 모든 자들의 부활의 소망이 되신 것처럼, 우리에게 임한 변화의 능력은 우리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우리를 통해 내 주변에 흘러갈 때에 완성되어지는 줄 믿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 가운데 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말씀처럼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37:16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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