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5); 택하심을 입은 자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5); 택하심을 입은 자 <살전 1:2~4>

일요시사 0 1190

사람들은 저마다 선택을 하고, 선택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늘 선택의 연속입니다. 심방을 다니다 보면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우리 애가 어느 학교에 합격을 했는데, 글쎄 경쟁률이 50대 1이었어요. 100대 1이었어요.” 또는 “우리 아들이 어느 회사에 이력서를 냈는데, 1명 뽑는데 수백 명이 몰려왔고, 그 중에서 우리 애가 뽑혔지 뭐예요.”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런 자녀를 둔 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면서 말씀을 하십니다. 50대 1, 100대 1, 1000대 1. 그 숫자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목소리도 높아지고, 어깨도 높아지고, 자신감도 높아지시곤 하십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선택 되었다는 것. 얼마나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서 감사의 제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의 선택 받은 증거가 드러나고 있음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럼 데살로니가 교인들만 하나님께 선택 받았습니까? 모세만 하나님께 선택 받았습니까? 다윗만 하나님께 선택 받았습니까? 이 자리에 함께 한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 어떤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택함 받은 자의 삶에는 반드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지난 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죠.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왜 믿음을 명사가 아닌, 동사라고 표현하는가?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삶의 흔적이 남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배의 삶이 없고, 헌신의 삶이 없고, 봉사의 삶이 없으면, 그건 믿음을 그냥 명사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네 믿음을 보이라.’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을 보이라는 것이 어떤 뜻일까요? 믿음을 통한 헌신, 봉사, 충성의 삶을 보이라는 겁니다. 네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어떠한 삶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이 어디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골리앗과의 싸움을 보세요.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면서 밤낮으로 나와서 싸움을 돋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다 믿는 자였습니다. 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그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서 다 숨고,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기를 40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때 누가 나타납니까? 소년 다윗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달려갑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그리고 잠시 후 쓰러진 골리앗을 밟고 올라선 다윗을 보게 됩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하나님의 역사로 바꿀 수 있었던 사람은 다윗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많습니다. 주일마다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습니다. 저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울 왕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처럼 그 믿음이 머릿속에만 머무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들. 물질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자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문제, 마치 골리앗처럼 나를 위협하는 수많은 다른 양상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커도 다윗 앞에 서 있는 개 한 마리와도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선택을 받으면 그에 합당한 수고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 보니까 사랑의 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에 실과 바늘처럼 따라오는 단어가 바로 수고, 희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처음에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씀드렸는데,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역시 사랑이라는 그 명사적인 단어로만 머물 때는 큰 의미를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인한 수고와 희생이 더해질 때, 즉 사랑에 따른 삶의 흔적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수고와 희생으로 드러날 때에 비로소 사랑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어렸을 적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맛있는 것을 드시지 않아도 괜찮은가 보다.” “우리 아빠는 아무리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은 분인가 보다.” “부모님은 졸립지도, 배고프지도, 피곤하지도 않은 분인가 보다.” 그런데 제가 아이들 셋을 키우고 있는 아빠가 되고 보니, 아빠도 힘들더라구요. 제 아내를 보니까 엄마도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사람이더라구요. 때로는 아이들이 맛있는 거 혼자 다 먹어버리면 마음 속으로 섭섭하기도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런데 그 모든 게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맛있는 것을 내 아이가 내 눈 앞에서 다 먹어 치워도, 나도 피곤하지만, 힘들다고 투정대는 아이 안고 걸어가는 것도, 다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 할 수가 있더라구요. 그게 바로 사랑의 수고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수고의 가장 최고봉을 어디서 발견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들을 자녀 삼아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아낌없이 주시는 그 사랑. 이보다 더 큰 사랑의 수고가 어디 있습니까? 로마서 5장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그리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사랑의 수고, 희생을 아끼지 않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아가 그 사랑 받은 자로서, 나 역시 하나님을 향해 작은 사랑의 수고, 사랑의 희생을 올려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뭐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전심으로 예배하는 것,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찬양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수고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희생의 값을 수 없는 사랑의 수고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 받은 우리들, 합당한 정성과 헌신, 그것이 시간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재능을 드리는 것이든, 무엇이든 주님께 올려드리는 사랑의 수고를 통해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 않은 미래를 향한 바람입니다. 그렇기에 소망은 우리에게 오늘을 살아갈 힘을 줍니다.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자는 매일의 삶 가운데, 주님 예비하신 축복의 날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힘 있게 걸어갑니다. 소망의 인내가 필요한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수많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시는데, 분명히 응답되어지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거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면 거기에 인내를 더해야 합니다. 날과 때를 누가 만드셨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거기에 인내하는 자세를 더하여 기도하면, 그 기도가 시작되는 시점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응답되어질 그 때를 정해놓으십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가 쌓여지고 쌓여져서 하나님이 가장 합당하게 여기시는 그 때에,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그 때에, 이사야 41장 17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가장 필요한 그 때에, 가장 적절한 그 때에, 응답하심의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이 때가 마지막인 것처럼, 이 때가 지나가면 소망이 없을 것처럼 살아가지만, 우리의 마지막은 주님 만나는 그 날입니다. 당장 보여지는 현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상황에만 묶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 받았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어도 감사할 것 뿐입니다. 거기에 주님 만나는 그 날을 소망하며 이 땅의 모든 치열하고 힘든 세상 가운데도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나아가면 승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 또한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로서, 그에 합당한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고, 사랑의 수고를 실천하고, 소망의 인내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걸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36:49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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