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53) 에벤에셀에 담긴 세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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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53) 에벤에셀에 담긴 세 가지 질문 <사무엘상 7:12~14>

일요시사 0 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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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 오늘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지명입니다. 에벤에셀은 히브리어로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한 돌을 기념비로 세우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의미를 담아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에벤에셀은 오늘 처음 나타나는 곳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4장 1절에, 오늘보다 20여 년 전에, 블레셋과 전쟁을 벌인 곳이 에벤에셀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하고, 하나님의 궤를 빼앗깁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면서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고 울부짖었던 곳이 바로 에벤에셀이란 곳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에벤에셀은 원래 기쁨의 장소, 승리의 장소가 아닙니다. 패배의 장소, 법궤를 빼앗긴 치욕의 장소,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 떠나갔음을 확증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20년이 지난 후에 새로운 영광이 시작되는 곳 역시 오늘 이 에벤에셀인 것을 보게 됩니다. 미스바가 영적 회심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이 곳 에벤에셀은 영적 회심을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증거, 떠나간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금 이스라엘에게 비춰지는 구체적인 증거가 드러나는 장소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는가?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7장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3절에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선포하죠. “너희들이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모든 우상을 다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이어서 4절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결단입니다. 

  

이를 통해 치욕의 장소 에벤에셀이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 에벤에셀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중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동행.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즉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삶에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에벤에셀 “여기까지 함께 하심으로 도움되신 하나님!” 오늘 이 시간, “에벤에셀” 이 안에 담겨진 세 가지 질문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선택해 보십시오. 기도는 답이다. 기도는 문제이다. 오늘 본문 앞서 5절에 보면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해서 성회를 개최합니다. 기도회를 여는 겁니다. 제물을 드리고, 금식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7절에 이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당장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기회를 잡은 겁니다. 다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있으니, 이때에 쳐들어가면 얼마나 수월하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습니까? 기도가 문제입니까? 답입니까? 오늘 상황만 보면 기도가 문제입니다. 기도하고 있어서 이런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인해 블레셋이 틈을 타서 쳐들어 왔으니 기도가 문제라고밖에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 상황을 보면 기도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기도하는 중에 문제가 생겼기에 해결되어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20년 전에는 오히려 전쟁 준비를 잘 했습니다. 더 힘을 내고자 하나님의 궤를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고, 하나님의 궤까지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전혀 준비를 못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기도만 하던 중에 블레셋이 쳐들어왔고, 이번에는 블레셋은 자신만만하고, 이스라엘은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승리하게 됩니다. 이유가 뭘까요? 20년 전에는 전쟁준비는 다 했는데, 기도가 없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오늘은 전쟁의 준비는 없었지만, 하나님을 사모함이 있었고, 회개하는 마음이 있었고, 기도하는 사무엘과 기도로 준비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세상에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가 기도로 준비하고 있으면 당장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의 시간은 한마디로 답안지를 작성하는 시간과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답안지를 받는 시간입니다. 날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 주시는 삶의 답을 채워가는 겁니다. 기도가 모든 문제의 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벽이든,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깨어 기도함으로 삶의 답안지를 잘 작성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내 자리는 어디인가? 

 

역시 두 가지 중에 하나 선택하시면 됩니다. 승리하는 자리인가? 패배하는 자리인가? 오늘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은 승리하는 자리에 있었고, 블레셋은 패배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승리하는 자리와 패배하는 자리에 무슨 차이가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왔을까요? 사무엘상 17장 47절에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다윗의 이 고백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승리하는 자리에, 그렇지 않은 자는 패배하는 자리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믿는 사람이라고 다 승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간 사울왕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나요? 다 믿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그 자부심 하나로 사는 민족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승리의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왜요? 마음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나가 싸우는 믿음의 행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쟁의 앞선 상황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어린 양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10절과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을 어지럽게 하고, 이스라엘은 나가서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군대를 쳐서 승리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자리 미스바에만 머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나가서 싸웠습니다. 자신들의 몫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에 합당한 결단의 행동이 더해질 때에 그들의 믿음이 도착도가 되어서 승리의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승리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실제적인 삶으로 완성되어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늘보좌에까지 올라감으로 응답되어지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는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사무엘과 같은 사람인가? 요엘과 아비야같은 사람인가?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사사 중에 하나입니다. 그 중 사무엘의 가장 귀한 모습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면이 있지만, 그 중에 저는 참 이 말씀이 은혜가 되고 사모가 됩니다. 에벤에셀의 승리를 거둔 후, 나오고 있는 오늘 본문 13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사무엘이라는 인물 하나로 인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자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영적인 영향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었던 것처럼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 주시는 평화와 축복이 나를 통해 주변에 퍼져나가는 은혜, 그 은혜를 사모하고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반면 요엘과 아비야는 가는 곳마다 좋지 못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습니다. 영적인 권세가 있는 인물들이 아니라, 육적인 만족만을 바라보는 이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왕정 제도를 시작하게 된 것에 있어서도 요엘과 아비야의 악행이 한 몫을 했던 것을 8장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있음이 오히려 이스라엘에는 해가 되었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의식도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사무엘과 같이 속한 공동체에 영적인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의 복된 인물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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