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56);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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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56);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마태복음 11:16~24>

일요시사 0 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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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년 같은 절기를 맞이하고 지냅니다. 송구영신예배, 사순절, 성금요일, 부활절, 추수감사주일, 성탄절, 또 송구영신예배.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절기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고, 성탄절이 되어도 그런가보다, 사순절이 되어도 그런가보다 하면서 지낼 때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내 안에 설렘과 감동이 어느새 사라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계시록 2장에 나온 에베소교회를 향한 책망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말씀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우리도 보면 그런 말씀들 참 많이 하시잖아요. “예전에는 정말 열심이었는데...” “예전에는 주일이고 평일이고 아주 교회에서 살았는데...”

  

물론 그 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충분히 애쓰셨고 수고들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늘 마음 한 편으로는 예전에 가졌던 열정의 모습이 그리울 때도 있고, 다시 한 번 힘을 내고 싶은 마음들도 다들 있으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지난 날 그 모습들이 녹아져서 지금 우리의 현재가 있는 거죠. 왜 그렇게 충성하셨나요? 왜 우리는 또 헌신해야 하나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이에 대한 답입니다.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우리 믿는 자에게 주어진 끊임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오늘 이 시간에는 사순절을 앞두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좀 더 깊이 묵상하는 시간 되길 원합니다. 십자가 죄 사함의 길, 그 거룩의 완성을 위한 길을 바라보는 시간 되길 원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걸음이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해 줍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결단이 새겨지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영적 민감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16절부터 17절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당시 세대를 비유적으로 평가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이 모습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는 것은 결혼 놀이를 하는 것이고, 슬피 우는 것은 장례 놀이를 하는 겁니다. 

  

내가 피리를 불면 저 친구가 춤을 추어야 하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내가 울면서 통곡을 하면 저 친구가 가슴을 치면서 맞장구를 쳐야 하는데, 그냥 가만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을 지금의 세대에 비유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데, 들으면 깨닫고 돌이켜야 하는데, 싫습니다. 그러니까 못 들은 척 합니다. 들어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말씀하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가 있는데도 들으려 하지를 않는 세대, 듣고 있으면서도 못 들은 척 하는 세대,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행하려 하지 않는 세대. 영적인 민감성을 잃어버린 세대.

 

 이 세대의 모습이 이천년전 예수님 시대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 

  

지금은 시대 자체가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영적인 은혜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이 들려져도, 기도가 울려퍼져도 나와는 다른 세상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슬피 울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영적 무관심의 세대. 

   

우리가 영적인 민감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를 바라보면 죄를 씻어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눈에 띠면 정결케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이 들려지면 변화를 향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춰야 합니다. 슬피 통곡하면 가슴을 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이 들려지면 춤을 춰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보여지면 가슴 치며 통곡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다가오는 사순절 기간! 영적인 민감함을 회복하고 주님 앞에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자기 합리화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런 말 들어보셨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어떤 명확한 기준 없이 자신의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이중 잣대로 무언가를 해석하고 평가할 때, 부정적인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죠.

  

오늘 예수님께서 18절과 19절에 세례요한과 자신을 비교해가면서 말씀하시는데, 딱 그 모습입니다. 18절에 보면 요한에 대해서 먼저 말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들렸다 하더니.”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고 그 앞에 가서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 모습을 본 유대주의자들, 율법학자들이 비판하면서 외칩니다. “저 세례요한은 귀신 들렸다. 저렇게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살아가는 것 보니, 귀신의 힘을 입어 사는 거다.”  이어서 19절에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말하는가?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예수님은 당시 소외된 자들을 품어주시고, 저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모여들고, 저들의 아픔을 위로하시고, 마음과 육신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은혜의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많은 이들의 인기를 얻게 되죠. 그러자 주변에서 말하는 겁니다. “저 예수라는 자는 먹기를 좋아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다.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친하게 어울리는 천박한 인물이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귀신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의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는 포도주와 음식을 탐하는 자라고 비난합니다.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비난하고, 먹으면 또 먹는다고 비난합니다. 저 광야에서 홀로 생활하니까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고, 함께 어울려서 교제하니까 죄인들의 친구라며 비난합니다.   

  

이 모든 정죄와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 있었나요? 자신들의 이권이 딱 자리를 잡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고수하고 있는 이 자리를 위협하는 세례요한의 일침, 내가 지니고 있는 권세를 위협하는 예수님의 가르침. 다 손으로 막아서는 겁니다. 

  

그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방식, 내 자리, 내 이권만 고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계속 스스로 위안을 삼습니다. 자기 합리화. 스스로 돌이킬 기회를 놓치고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해 나갑니다. 그러다보니 그 안에 회개, 변화, 하나님의 역사, 그런 건 없는 거죠. 

  

신앙생활 속에서 자기 합리화에 묶이기 시작하면 답이 없습니다. 오늘 세례요한을 향해, 예수님을 향해 비난하던 저들도 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자기합리화를 떨쳐버리지 못하니까 어떤 메시지를 들어도 돌이키지 않고 변화를 모색하지 않고, 자꾸 밀어내기만 합니다. 그러자 19절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비난의 날을 세운 이들을 향해 한 마디 말씀을 주십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요한의 메시지 선포와 삶, 그리고 결과를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삶과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내 자아, 자기합리화의 그늘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원하시는 변화의 역사가 우리 삶에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끝으로, 회개라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본문 20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아니한 마을들에 대해 책망을 하십니다. 고라신과 벳세대와 가버나움입니다. 이 세 도시는 갈릴리 호수 북쪽 편에 몰려 있는 서로 인접한 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이상하게도 그 지역의 사람들은 회개하지를 않습니다.

 

 21절에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라.” 이어서 23절에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이 도시들이 책망받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교만함입니다. 교만함에 똘똘 뭉쳐있는 모습.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콧 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 수많은 권능을 바라보면서도 절대 굳건한 교만의 반석 위에 흔들림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움과 함께 예수님께서 저들을 책망하시는데, 비유하는 도시가 두로와 시돈과 소돔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멸망당한 성읍입니다. 소돔은 타락과 부패의 상징적인 도시입니다. 이 모든 멸망당한 성읍들에서 예수님께서 이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면 그 도시들이 멸망당하지 않고 아직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함으로 주님 앞으로 돌아서서 믿음의 울타리,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거했을 것이기에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죠.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 오늘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은 비단 이 도시들만이 아니죠. 예수님의 권능과 기적의 역사를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죄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책망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말씀 앞에 서서 늘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신앙의 삶을 살아간다고 자부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책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항상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늘 내 중심, 교만함 가운데 서 있는 우리 자신을 향한 책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바라기는 이 사순절 기간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나 자신에게 있어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를 먼저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의 열매도, 축복의 열매도, 소망의 열매도, 형통의 열매도, 헌신의 열매도, 봉사의 열매도, 충성의 열매도, 영적 성장의 열매도, 성령의 열매도 맺어갈 수 있게 됩니다. 먼저 회개의 열매를 맺어 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기간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영적인 민감함을 회복하십시오. 자기 합리화의 그늘을 떨쳐버리십시오. 진실된 회개의 열매를 맺어 가십시오. 

  그리하여 금년 2020년 사순절 기간에,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영적 순례의 걸음을 새겨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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